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들이 생각하는 복된 소식을 주변 지인들에게 나누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작게는 H 마트에 쿠폰이나 큰 세일하는 소식이 있어도 좋은 소식이라고 주변에 막 전하려고 하고, 코스트코에서 좋은 물건이 나왔으면 이것을 알려 주려고 좋은 소식이라고 전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 동네에 맛집이 새로 생겼다고 하고 어디 있는지 알려주려고 하고, 여행을 갈 때 어디를 가면 좋은 지 알려주려 하는 유튜브 채널이 많을 정도로 나름의 좋은 소식들을 주변에 계속 전하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어떤 좋은 소식을 듣고 주변에 전하고 살아가는가가 결국 인생에 있어서 내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듣고 전하는 복된 소식, 복음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사도 바울이 듣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된 소식은 어디 가면 집을 잘 사고, 어디 가면 돈을 더 잘 벌고….이런 세상적인 것에 대한 복된 소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인생을 걸고 전하려는 복된 소식은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그의 인생을 뒤집었으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명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전하는데 올인하고 그것을 절대적 가치로 두고 살아간 자가 사도 바울입니다.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전한 복된 소식, 복음은 사도 바울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만나는 사람들을 변화시켰으며, 그 시대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인생을 걸고 전한 복된 소식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떠난 후 유사복음/다른 복음을 듣고 젖어 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은 복음의 내용이 비슷했지만 결정적으로 끝에 가서 달랐습니다. 그런데 많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전했던 순전한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에 젖어 살아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전해진 것이 아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증언합니다. 순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시작됨을 믿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으로 충분한 구원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고 빼려는 것, 거기에 어떤 다른 자격이나 조건들을 넣으려 하는 것은 모두 순전한 복음에 왜곡과 변질을 가져오는 다른 복음이 되어 버립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충분한 구원, 그 외에 어떤 것도 필요 없는 구원을 흔드는 큰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나의 구원에 인간의 어떤 것도 자격과 조건이 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으로 충분하다…이 순전한 복음에 무언가를 더하고 빼려는 그 시도 자체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우리가 확인하고 마음에 새겨 되는 것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왜 진짜 복된 소식인가는 거예요. 결국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한 일이 어떻게 나를 구원하셨다 정확하게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무엇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고 영접 하는 게 왜 구원받는데 충분한가? 그 외에 다른 것은 왜 필요하지 않은가? 이것을 정확하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자들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인간에서 기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사람의 지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아는 데서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들에게 배우거나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배우거나 받는 것, 이게 바로 유대교의 일반적인 가르침의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만나기 전까지 그가 평생 동안 했던 그의 종교 방식은 바로 사람에게 받거나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훌륭한 랍비를 통해 받거나 배우는 게 그가 유대교를 통하여 했던 가르침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사람에게 배우거나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알려주는 만큼 알려 주시는 만큼 알게 되는 신비입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내가 노력한다고 내가 업을 쌓는다고 공로를 쌓는다고 그 결과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만큼만 아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 아는 신비, 그 주도권이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만이 원인이고 이유이고, 예수님 만이 바로 신앙의 원인이고 이유이고 핵심임을 고백하는 것,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하는 순전한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을 향한 이 분명한 확신과 열정, 다른 복음으로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에 대한 불타는 안타까움을 우리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나에게 예수님이 정말 복된 소식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정말로 나에게는 복된 소식인가? 그 복된 소식을 전하는 부르심이 나에게 분명히 있는가? 를 진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를 통해 내가 구원 받았다는 이 놀라운 고백도 내가 은혜를 받을 만해서 내가 노력해서 받을 만한 성적이 되서 받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 은혜는 내가 그 어떤 걸로도 자격과 조건이 안 된다는 철저한 자격 없음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선물로서 주신만큼 받는 것이고, 구원받은 기적 뿐 아니라 나의 삶의 모든 게 대가가 아니라 은혜로 받은 선물이기에, 주신만큼 받는 것입니다. 구원도 예수 그리스도의 통하여 일방적으로 은혜의 선물을 주신 것이고요 내 일상의 축복도 모두 주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기에 주님이 주신만큼 기쁨으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향해 주시는 구원과 약속들이 이루어지고요.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만큼 알게 되고, 알려 주시는 만큼 깨닫게 되는 선물 받은 삶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시작과 끝은, 모든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음을 철저히 믿으며, 예수 보혈이 나를 건지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충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에 속한 자인 우리가 믿고 살아가는 놀라운 복음의 신비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변에 무슨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십니까? 오늘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전하며 살아가십니까? 우리는 성도로 부름 받아 이 세상에서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간다 고백하는데, 일주일 내내 우리가 전한 복된 소식은 그저 땅에 있는 것이 전부하면, 그게 내가 전한 복된 소식의 전부라면 우리는 나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가 예수님이 복된 소식인 걸 실제로 누리지 못하고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음이 나에게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흘러 넘치는 감격이 되지 못한다면, 결국 내가 전하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아니라 다른 걸 전하다가 끝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분명한 확신, 내가 전하는 복음의 1번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이라는 이 분명한 확신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에게 예수님과 십자가 복음이 감격이고 힘과 능력인지, 내가 전하는 진짜 복된 소식의 첫 번째인지….조율하기 원합니다. 이 땅의 것과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사소한 것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복된 소식으로 내가 깨달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기 원합니다. 내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이 감격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회복할 때 그 복된 소식을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 복된 소식으로 구원받은 자, 그분의 주도권 안에 엎드리는 주의 백성으로 예수 십자가 은혜를 복된 소식으로 알아, 복음을 전하는 선명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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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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