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터키 중부 지방에 해당되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을 향하여 쓴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그 갈라디아 교회가 주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다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는 사도행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순전한 복음을 전해서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들을 세웠는데, 그가 떠난 이후에 그 안에 유대교 배경의 그리스도인이 순전한 복음에 자꾸 물타기를 하는 것것이 문제의 본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는 건 아닌데 십자가 복음으로 충분히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치기 시작하는 겁니다.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 십자가 복음에 안식일도 지켜야 되고 할례도 행해야 되는 이런 것들을 구원의 조건들로 만들어 놓으면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이방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유대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자꾸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쫓아와서 사역을 방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세우는 교회들을 자꾸 다른 복음으로 흔들어놓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고 깎아내리면서 이방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믿고 찾아오는 이방 성도들에게 복음에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참담한 소식을 들으며 사도바울이 마음이 무너지고 절박한 마음으로 갈라디아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굉장히 전투적이고 말이 직선적이고 셉니다. 그만큼 급한 마음으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시에 사도 바울을 통하여 십자가 복음만으로 충분한 복음, 본질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알게 하시는 귀한 서신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사도바울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비판하던 것을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인 살인자라는 과거이고 두번째는 사도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예수님 살아 계실 때 함께 했던 제자가 아니니까 사도 바울은 진짜 예수님의 사도가 아니라는 꼬리표와 비판이 늘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갈라디아서 처음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라고 선포하며 시작하는 것은 이런 사도성에 대한 비판과 비난에 대한 그의 분명한 고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난 사도가 아니고 사람들이 인정하는 투표로 된 사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라는 것을 내가 분명히 믿는다는 것을 선언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을 향한 그 뜨거운 사랑과 헌신에 도움이 되는 대신 오히려 끊어 버리려 하고 걸림돌이 되려 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분명한 선포를 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보내심과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면 사람들이 비판을 하든 비난을 부인을 하던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게 사람으로부터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도로서 우리 삶의 방향성은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옴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참조는 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명자,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보냄받은 자로서의 삶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나의 삶의 방향성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뭐라 말해도,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해도 그건 다 상대적이고 흘러가는 것들이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는가 대한 분명한 확신으로부터 나의 인생에 분명한 방향성이 시작되는 겁니다. 보내심과 부르심….그것은 단순히 목회자의 목회 여정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가는 내 삶의 방향성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의 여정은 결국 하나님의 보내심과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게 사도 바울의 분명한 삶의 확신과 방향성이었고,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도전하는 분명한 삶의 확신과 방향성이 되기 원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어쩌다가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 세상에 온 존재라는 분명한 보내심, 이 세상에서 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아래 살고 있다는 분명한 부르심, 그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자들이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들의 삶임을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보내심과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서 교회를 이루어 이 세상에 존재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 그게 3절에 나오는 하늘에서 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럼 성도의 삶에 부어지는 은혜와 평강이 무엇입니까? 사실 이 은혜와 평강은 갈라디아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등장하는 서두 축복인사이기도 할 만큼 중요합니다. 은혜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죄인이었을 주시는 그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자격도 없이 조건도 없이 내가 그 십자가 은혜를 선물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된 거죠. 아무 자격도 조건도 되지 않는 내가 그 큰 구원의 선물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아는 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을 알면 내 인생은 다 하나님이 자격 없이 일방적으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 줘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죠. 내가 죄에서 구원받고 건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의 선물, 내 인생을 복 가운데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 내가 살아 숨쉬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삶의 고백으로 누리는 게 은혜의 삶입니다. 내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시는 숨결이 선물과 같이 여전히 나에게 불어넣어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나의 숨쉬는 순간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선물 받아 사는 존재 임을 알고 깨닫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삶입니다. 그 은혜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삶에는 부어지는 게 평강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샬롬을 빼앗기지 않게 되는 본질은 나의 삶에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선물 받아 사는 존재임을 알기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이 나의 인생을 책임져 주심을 믿을 때 평강이 임하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어서 내가 내 인생을 다 책임 지지 않아도 되는 인생, 나는 믿고 맡길 분이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찾아오는 게 하늘의 평강입니다.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계심을 믿는 삶, 책임져 주시는 분이 있음을 믿는 삶 속에 평강이 임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삶에서 직면하는 골리앗에게 압도당하지 않고 골리앗 뒤에 계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평강이 나를 덮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고 회복된 관계로 예수님과 교제하며 살아갈 때에 내 매일의 삶은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게 되고, 내 삶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보호함을 받으며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삶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평강입니다. 진정한 자유함을 주신 십자가 복음만을 선명히 붙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으면서 함께 갈라디아서의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셨고, 나를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인생의 기초를 하나님의 보내심과 부르심에 놓으며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리는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보내심과 부르심 앞에 내 인생이 있음을 믿으며 살아갈 때 나의 인생에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임합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주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십자가 사랑 붙들고 평강을 현재형으로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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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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