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회개하는 대신 본인의 죄를 덮기 위해서 또 다른 제2의 제3의 죄를 계속 짓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말씀은 증언합니다. 다윗이 보지 말아야 할 여인을 주목하여 봄으로 음욕을 타고 그 모든 악한 것이 들어와서 다윗을 죄악으로 움직이는 힘이 되어 버리며, 변질 시키고 무너뜨리는 파괴적 힘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자리, 그 무너진 죄의 열매를 맺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봤으면 사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실패했습니다. 대신 그가 한 것은 마치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며 악인의 꾀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집으로 호출해서 집에서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목숨걸고 전쟁하는 우리야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밧세바가 임신한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자신의 죄를 가리고 숨기기 위해…그런데 그 계획이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로 계략을 세웠던 건 우리야에게 술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인사불성이 되어 집에 당연히 들어갈 줄 알았는데 또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두 번 계획이 꺾이게 되면 아 이게 하나님이 막으시는 일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정신 차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이 어두워지고 마치 하나님이 안 보시는 것처럼 착각하는 다윗은 모든 영적 감각들이 다 마비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막으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죄의 현장 앞에서 이렇게 막으시는 하나님의 그 손 가운데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두 손들고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거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그 회개의 길을 가지 않고 또 다른 더 끔찍한 악인의 꾀를 계획하게 됩니다.
다윗은 또 한번 왕명이 담긴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는 뭐냐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맨 앞에 세워 죽이라는 명이 담긴 편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고 보호하라고 다윗에게 왕으로서 맡겨진 자리와 맡겨진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을 살리고 보호하기는 커녕 왕이라는 권한을 이용해서 계속해서 자기를 위해 백성을 죽이는데 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전쟁을 통해 죽게 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누가 죽이는 것인가 하면 다윗왕이 죽이는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전쟁터의 현장에서 전사하며 죽기에 다윗이 죽인 게 아닌데, 사실 다윗왕이 죽게 만드는 간접 살인인 것입니다. 악한 자의 꾀가 이렇다는 겁니다. 겉으로 봐서 사람들이 잘 몰라요. 그런데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그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었던 것이죠. 하나님께 순전했던 다윗 왕이 이렇게 한 방에 완전히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보시는 것처럼….눈으로 가리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겉으로 그냥 멀쩡한 것처럼 계략을 통해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죽이는게 아니라 마치 본인은 죽이지 않는 것처럼 간접 살인으로 몰아가면서 자신을 위협했던 우리아를 제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야는 전쟁터에서 이유도 모른 채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우리야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다윗왕이 보인 반응은 놀랍기만 합니다.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사람들은 다 칼로 죽을 수밖에 없다…마치 자기가 계획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는 더욱 열심히 싸워서 그 성을 함락시키고 담대하게 나가서 싸우라 명합니다. 어떻게 다윗이 이렇게 뻔뻔해질 수 있습니까? 과연 이 사람이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 하나님께 합한 자, 순전한 다윗이 맞는가? 본인이 우리아를 죽이게 된 장본인인데 본인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속으로 안도하고 좋아하고 있는 그 속마음이 보이십니까? 이게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은 죄의 비참하고도 파괴적인 결과라는 것입니다. 죄를 품고 거짓의 사람으로 살게 될 때 이렇게 모든 관계를 깨뜨리는 죄의 권세가 지금 다윗왕에게 놀랍게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윗과 달리 뻔뻔하지 못한 밧세바의 모습을 말씀은 선명히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들고 크게 통곡했습니다. 왜 그렇게 통곡하며 울었을까요? 당연히 남편이 죽었으니까 슬퍼해서 울었습니다. 단지 그 남편이 전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남편 우리야가 억울하게 말도 안 되게 죽었다는 것을 밧세바는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몸에 자라고 있는 아이가 이 우리아의 아기가 아니라는 것도, 전쟁터에서 이유 없이 호출되어 자기와 함께 동침하도록 강요받은 것도 알고 있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동침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순전 하려고 했던 우리아가 당했던 결과는 뭐냐면 전쟁터에 나가서 억울하게 죽은 것을 밧세바는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슬퍼하며 통곡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결론은 다윗의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입니다. 전사한 우리야의 아내를 거둬서 왕궁으로 데려와서 부인을 삼습니다. 이 끔찍한 일이 사람들 눈에는 별 큰 문제 없이 마무리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거둔 씨앗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지금 잘 마무리 된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의 계획은 성공적인 것 같이 보였는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이 정확하게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생에 있어서 늘 중요한 질문들, 하나님은 나에게 왕이신가,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가, 그 하나님을 나는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이 본질적 질문에 모두 실패하고 무너진 한 사람이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야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사실 죽어야 하는 사람은 다윗왕인데 죽지 말아야 되는데 우리야는 억울하게 죽었던 것이죠. 가인의 손에 아벨이 억울하게 죽은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순전하게 살았던 다윗왕, 하나님을 향하여 열망을 가졌던 그 다윗 왕이 하루아침에 변질되고 무너지며 죄의 권세에 눌려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악한 음식을 영의 눈과 귀를 통해 마음에 담아 꼭꼭 씹게 되면 그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지금 다윗을 움직이는 파괴적인 힘이 되고 있는 비참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뭐냐면 실패와 실수와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가리고 거짓을 가리려면 구구절절 변명해야 될 게 많습니다. 죄를 덮으려면 사람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 눈이 가려지고 마음이 어두워지면 우리도 하루 아침에 변질되고 이렇게 무너질 수 있음을 잊지 말고 경각심을 가지고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내 삶에 왕이 아니신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가 착각하고 이렇게 철저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와 눈물의 자리, 죄를 지은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그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돌이키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다시 한번 새 출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믿습니다. 다윗의 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변질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삶 가운데 언제 어디서나 바라보고 계시는 그 주님을 붙들고 무너지고 죄진 자리에서 주님을 향해 두 손 들고 돌아가 새 출발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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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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