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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고요. 방언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따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찾을 정도로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성경적 기초를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놀라운 은사가 충만했지만, 동시에 교회 안에 갈등과 문제도 충만한 이 양립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영적 은사가 풀어지는 것도 분명했는데 동시에 그들은 영적으로 미성숙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있는 게 바로 이 방언 은사에 대한 문제였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혼란했고 그것 때문에 교회가 갈등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오늘과 내일 새벽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은사인 이 방언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다지는 시간을 가지기 원합니다. 이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세 가지의 큰 그림을 잡으면서 말씀을 좀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큰 세가지의 그림은 먼저 방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고요. 두 번째는 방언 은사의 영적인 유익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방언 은사의 도전과 문제는 무엇인가…입니다. 오늘 말씀은 첫 두가지 질문을, 내일 말씀은 마지막 질문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첫번째, 성령의 은사로서 방언은 무엇인가? 방언이란 "Speaking in Tongue" 이라고도 하고 "Glossolalia" 라고도 하는데 많은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종교체험 현상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방언은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기독교를 넘어 여러 종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많이 발생하고 보여지는 종교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방언이라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현상과 경험을 넘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증언하는 은사로서 주신 방언은 무엇이고 그 방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의 은사로 주신 방언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기도하시게 하시는 귀한 은사와 통로 중에 하나입니다. 적어도 성경에는 하나의 방언이 아닌 두 종류의 방언이 등장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두 종류의 방언은 바로 사도행전적 방언이고 또 하나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고린도 전서적 방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행전적 방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서의 방언이었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은 알아들 수 없는 소위 말하는 천상의 기도라고 말하는 방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경험하고 체험한 방언만 진짜다 이러면 안 되고 성경이 증언하는 방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합니다. 먼저 이 사도행전적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성령 강림 가운데 임한 놀라운 역사 가운데 등장했던 방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을 기도하며 주님께 간구했을 때 오순절날 때가 차매 위로부터 성령 하나님이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강력하게 임하셔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이 임해 바로 각 사람에게 주신 방언은 16개의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외국어를 배워보지 않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외국어로 말하게 되는 그런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죠. 외국을 한 번도 가 보지 않고 외국어를 배워보지도 않은 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는데 외국어로 기도하며 말하더라는 겁니다. 이런 방언의 은사가 바로 사도행전적 방언이라는 것이죠. 그 성령 충만으로 받게 되는 방언은 그럼 어떤 방언이겠습니까? 바로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귀한 방언이죠. 그래서 선교적 목적을 따라 강력하게 임하셔서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은사를 주셔서 성령 충만한 방언을 하게 하신 겁니다. 두 번째는 사도행전적 방언만 있는 게 아니라 고린도전서적인 방언이 있는데 그 방언이 바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입니다. 방언 기도를 하는데 본인도 모를 때도 있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 못하는 방언입니다. 요즘에 많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방언을 받았다. 방언 기도를 한다 그러면 대부분이 두 번째 고린도전서적 방언 기도를 얘기하는 경우입니다. 성령의 은사로 주신 방언의 은사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언의 은사에 대해 교회 역사를 보면 늘 두 가지의 극단이 존재했었습니다. 첫 번째 극단은 방언이 다 끝났다고 여기는 방언 폐기론자들입니다. 오늘날 방언의 은사는 이미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계시의 종결성이라 그러는데 성경 말씀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 후에는 방언은 필요 없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임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모두 완전하게 주시고 나서는 방언은 필요 없는 것이 됐다고 여기는 방언 폐기론자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대표적 근거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듯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이런 말씀을 들고 나오는 겁니다. 사실 이 말씀을 가지고 방언의 은사가 모두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지나침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가 모두 끝났다고 주장하는 이 방언 폐기론자들의 주장이 저는 피해야 할 극단이라고 여깁니다. 정반대의 극단도 존재하는데 바로 방언 만능론자들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특별히 영적 신앙 생활의 모든 게 방언으로 통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방언의 은사로 나누려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방언을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은 거라고 규정하고, 방언을 안 받으면 엉터리 크리스천이라고 단정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외적 증거를 방언으로 여기며 그래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의 증거로서 방언을 들이대는 방언 만능론자들입니다. 방언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모든 것을 방언으로부터 결정되며, 특별히 방언 하나 가지고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을 나누는 기준을 삼아버리는 것, 이것 또한 굉장히 위험하다는 겁니다. 방언 만능론으로 가면 안 되고 반드시 영적 질서와 우선 순위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 다 문제 있고 둘 다 왜곡되고 변질된 피해야 할 극단입니다. 그 두 가지의 극단을 피하면서 말씀의 기준에 맞는 방언의 은사를 잘 구하며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번째,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가 주시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방언 은사의 유익을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는데 두 가지로 오늘 말씀은 기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방언 은사의 유익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분명히 체험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한다는 겁니다. 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는구나…이것을 확신하게 되면서 체험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죠.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 없이, 사람들이 보던 말던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게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하는 게 방언의 축복입니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방언에 지극히 비판적이어서 방언 기도하면 뭔 소린지 본인도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뭐 그런 샬라샬라 하는 기도를 계속 하느냐? 그럼 정반대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죠.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게 뭘 그렇게 중요하냐는 것이죠. 중요한 건 뭐예요? 하나님이 지금 그것을 알아들으시면 되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만 드리는 기도니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해도 그건 상관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방언 기도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믿음의 한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명히 믿으며 하나님이 들으시면 된다는 것을 붙들고 나아가는 겁니다. 또 하나 방언의 유익은 깊은 기도와 오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신앙 생활에서 기도가 얄팍할 때 늘 우리는 식기도 중심으로 짧은 기도를 합니다. 식사 중심으로 간결한 기도를 하게 되는데 방언의 은사를 받아 기도를 하게 되면 식사 기도를 넘어서 일상에서 시간을 정해두고 충분히 기도하게 되고 깊게 기도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분들은 때로는 기도하다 보면 한 두시간이 그냥 간다고 고백하는 분들이 많은 겁니다. 기도를 오래 하는 사람들, 기도를 깊게 하는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를 통해 그 은혜를 풍성히 받게 되는 겁니다. 충분히 기도하고 깊게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구하는 기도가 내 삶에 젖어 들게 하는데 방언의 은사가 큰 유익을 주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방언의 은사는 나의 유익과 덕을 위해 주신 선물임을 강조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믿기에 보이지 않는 영적 은사를 구하고 사모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를 분명히 믿음기에, 사랑을 추구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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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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