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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ly Morning Prayer

새벽기도회: 5:30am (화-토) 

새벽기도회 말씀은 좋은 씨앗교회 Youtube 방송 채널을 통해 시청이 가능합니다. 
아래 버튼을 누르시면 바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새벽 말씀 듣기
새벽묵상 "귀하게 혹은 천하게 쓰임받는 그릇의 오해를 버리라"
딤후 2,20-26 | 09-15-2020
오늘 말씀은 잘 아시는 말씀 이자 동시에 오해가 많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과 질 그릇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거기서 귀하게 쓰임 받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임 받는 것도 있다 증언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금그릇과 은그릇으로 귀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같이 천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이해합니다. 이 말씀을 소위 말하는 수저론으로 이해해 태생이 금그릇인 사람들, 태생이 질그릇인 사람들이 있다 이해하는데 그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은 금그릇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질그릇으로 태어난게 운명이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금 그릇은 목사님, 은 그릇은 장로님, 나무 그릇은 권사님, 질 그릇은 집사님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런 오해와 잘못된 해석이 빈번한 이유는 한글로 번역된 “귀하게 쓰임 받음”과 “천하게 쓰임받음”에 대한 말씀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왕 하나님께 쓰임 받을 거면 금그릇과 은그릇 같이 귀하게 쓰임 받아야지,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 같이 천하게 쓰임 받으면 안된다…이런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것,” “천하게 쓰임 받는 것” 은 대표적 한글 성경의 오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이 원문의 훨씬 더 근접하게 잘 번역을 했어요. 여기서 귀하게 쓰인다는 것은 Special Uses, 천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은 Common Uses입니다. 그러니까 귀하게 혹은 천하게 쓰임받는게 아니라 특별할때 가끔 쓰임받는 것과 일상에서 자주 쓰임받는 그릇이 있는 것이지요. 금그릇을 매일 쓸 순 없습니다. 그러니까 금 그릇은 아주 일 년에 한두 번 겨우 쓸까 말까 한 거죠. 그런데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은 일상에서 매일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릇들 중에 하나님 앞에 그냥 일년에 한두번 특별하게 쓰임 받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매일 일상적인 삶에서 쓰임 받는 자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귀천의 문제도 아니고 사명의 다양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귀하게 쓰임받고 천하게 쓰임받는 그런 수저론이나 계급을 말하는게 절대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내가 금그릇으로 왔는지, 은그릇으로 왔는지 혹은 질그릇으로 왔는지를 재고 따지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금 그릇 이어도 더러우면 쓰임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금그릇이면 뭐합니까?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데.. 그렇기에 나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 그릇을 깨끗하게 준비하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 내가 깨끗하게 준비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금그릇에 나와도 더러운 그릇에 담겨 나오면 식당에서 다 바꿔달라 그럽니다. 그래서 깨끗하지 않은 그릇 때문에 음식을 다 버리게 되는 것이죠. 우리 인생에 있어 하나님께 쓰임받느냐 쓰임 받지 못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죠.
우리는 여전히 내가 무슨 그릇인가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내가 너를 쓸 수 있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는 여전히 사람들을 줄세워서 금그릇인지, 은그릇인지 혹은 질그릇인지 비교하고 그게 너의 운명이라 가르칩니다. 그렇게 껍데기로 사람들을 나눠서 그것을 귀하다 천하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쓰실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며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이 비참한 인생이자 결국 버림 받는 그릇이 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뭐냐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짖으며 그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선한 일에 준비된 인생이 되는 귀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그릇이 되는 게 귀한 인생….하나님 앞에 크기가 큰게 귀한 인생이 아니라 비싼 그릇이 귀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그릇, 깨끗함으로 준비하는 자가 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그릇인가 비교하고 줄세우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부르심을 받아 오늘 쓰임 받고 있느냐 에 집중하십시오. 거룩한 주님의 쓰심에 합당 하도록 우리는 늘 깨끗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거룩한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자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명에 쓰임받는 욕심을 낼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함으로 준비 되 쓰임받음으로 하나님께 칭찬 받는 것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주님의 공동체에서 주적을 분명히 알며 사명을 잊어버리지 않고 이 세상에서 매일 귀하게 쓰임 받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사명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지금은 입다물고 참아야 할 때이다."
딤후 2,14-19 | 09-12-2020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경험했던 외부적인 문제는 사도 바울과 동일하게 바로 예수님을 믿고 증거하는 것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그런 외부적인 핍박과 박해도 힘든데 젊은 목회자 디모데가 교회 안에 겪었던 어려움이 바로 교회 안에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말다툼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말이 많아 어려움을 겪는 교회였습니다. 소위 열심이 있다는 성도들 사이에 이단 사상에 빠진 자들이 주도하는 말다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분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디모데 전서에 과부를 어떻게 도와야 되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침을 통해 그 교회 안에 과부 구제 문제로 말이 돌았고 말이 씨가 되어 말다툼이 되고 교회의 갈등과 어려움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말다툼에 대해 경고하는 것을 통해 교회 안에 말로 인한 어려움이 제법 컸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외부적 문제 자체로도 너무 어려운데 내부적으로 교회 안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젊은 목회자 디모데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가 직면한 이 말다툼을 엄격하게 금지하는데, 두 가지의 이유를 됩니다. 첫번째는 유익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 내 말이 옳다며 핏대를 세우고 말다툼을 하며 싸우면 결국은 누구를 기쁘게 하는 거냐 하면 사단만 기쁘게 하고 박수 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는 아무런 영광도 없고 아무런 유입도 없는 게 아군 끼리의 말싸움입니다. 우리의 주적은 목사님이 아니고 장로님이 아니에요. 사단 마귀임을 항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흔드는 그 전략을 통해 교회가 작은 일을 크게 만들어 서로 싸우고 성도들이 서로가 내부 총질로 무너지게 만드는 게 사단의 전략이라는 것을 항시도 잊으면 안됩니다. 두번째, 말다툼을 통해 결국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한다는 것이죠. 교회에서 성도들의 입술 가운데 나오는 말들이 소망과 사랑과 믿음을 자라도록 해야 되는데 말싸움을 하는 입이 된다 생각해보세요. 입에서 부정적인 것만 나오고 교회를 다닌다는 데 늪 불평만 나오고 다툼만 나오면 그곳에서 신앙 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 싸움을 하면 그 말싸움을 듣는 자도 말하는 자도 서로 망하게 만드는 해로운 일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고, 믿음을 낙담하게 만들며 가지고 있던 불을 확 꺼버리는 것이 바로 말다툼이며 영적인 공해와 같은 전염병입니다.
이 말다툼을 바울은 좀더 강력하게 “망령 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경고하며 그런 말싸움은 “악성 종양과 같이 퍼져 나간다.” 경고합니다. 초대 교회는 그 거대한 로마 제국의 핍박과 박해와 순교를 버텨 내기에도 너무나 어려운데 이렇게 교회 안에 말싸움으로 미꾸라지같이 교회를 흔드는 사람들이 있어서 교회가 흔들리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이런 잘못된 사람들이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악한 영향을 주어 공동체를 분열하며 무너지게 만든다는 것이죠. 이렇게 교회를 영적 분위기를 흐르게 만드는 말싸움이 망령 되고 헛된 말들이고, 악성 종양과 같이 퍼져나간다고 경고하는 겁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코로나 같이 무섭게 퍼져 나간다고 아마 그랬을 것 같아요. 코로나같이 알게 모르게 무증상 자들에게 빨리빨리 확산시키는 것 같이 망령 되고 헛된 말들이 교회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무너지게 만든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조기에 발견해서 조치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 전체가 흔들리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현재 우리가 직면한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생각해봅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라는 외부적인 지금 도전과 어려움으로 예배당 문이 닫히고 건물을 열 수가 없으며 성도들의 삶이 광야로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저번주에는 Wild fire로 인해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의 대기 오염에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외부의 문제 자체로도 몸된 교회가 충분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 수록 교회 공동체 안에는 그런 외부적인 환경적 어려움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이런 작은 말다툼으로 교회 안의 갈등과 분쟁과 어려움을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외부의 어려움을 잘 참았다가 내부적 문제가 터져 교회 공동체가 어려워지는 것을 우리는 이곳 저곳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이럴 때 사단은 늘 교회의 내부의 문제를 흔들어 말다툼을 하게 만들며 서로 싸우며 교회가 교회 끼리, 성도가 성도끼리, 내부 총질하며 이 말다툼으로 균열하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들며 박수치며 쾌재를 부르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코로나와 같은 큰 어려움을 지날 때 무엇을 해야 하냐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지금은 입다물고 참아야 합니다. 악성종양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이 교회 공동체를 흔들고 어렵게 만들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믿음을 세우는 대신에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자기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미치며 말다툼과 말싸움으로 이런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교회 공동체를 흔들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헛된 말싸움을 버리고 입에 재갈을 물리며,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진리를 올바르게 분별하며 부끄러워 없는 일꾼으로 주님 앞에 서기를 각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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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딤후 2,7-13 | 09-11-2020
딤 2장은 복음의 일꾼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하는지, 좋은 선수가 되어야 하는지, 농부가 되어야 하는지를 증언합니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부름 받았으며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주신 규칙과 법대로 살아야 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또한 그들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자들이 아니라 인내함으로 눈물과 땀을 흘려 마침내 결실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 그리스도의 선수로 농부로 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한글에서는 그리스도의 길을 기억하라…가 제일 나중에 나오지만, 영어에는 Remember Jesus Christ..가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함 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고 좋은 선수가 되고 농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분명히 기억하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메시야라는 고백입니다. 두번째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죠. 그것이 사도 바울의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신앙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로 예배를 제대로 모여 드리지 못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상황은 마비된 것 같고 코로나로 모든게 멈춘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은 마비되지 않고 매이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매지 않고 자유케 하는 복음 가운데 이 코로나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새 힘과 소망을 주는 것이죠. 그 복음을 위해 10절 말씀 보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고백한 로마서의 8장의 고백이 그대로 투영되는 듯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서 지금 갇혀 있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절박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렇게 쇠사슬에 메어 있는 고난 중에도 자신의 환경과 상황에 집중하지 않고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증거합니다. 사람은 메일 수 있고, 환경에 압도 당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과 말씀은 메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 인내가 필요하고 군사와 같이 훈련하며 매일매일 내 일상을 흘려 내적으로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내는 성령의 도우심을 붙들고 하는 내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하는 인내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음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그 영원한 영광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그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 고난과 어려움을 참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공급 받으십니까? 현재의 모든 것을 참으며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말며 그리스도만을 바라볼때, 하늘의 은혜로 주시는 강함이 부어지고 성령의 권능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그리스도의 사명자들은 구원과 함께 받을 이 영광을 붙들고 현재를 참고 견디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며 그 복음 위에 나의 기초를 쌓으며 현재 모든 것들을 견디며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살아가는 비결이 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으십시오. 그 구원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을 그 구원의 감격을 붙들고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 내십시오. 그것을 통해 현재의 고난과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광은 비교할 수 없음을 알며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는 그 감격을 붙들고 우리는 항상 천국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의 고백이고 우리가 믿는 복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새벽묵상 "내 살을 도려내 듯 마음에서 잘라낼 것이 있다."
신 30,1-10 | 08-21-2020
신명기 29장은 대부분 심판을 받는다는 저주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30장은 돌아오라는 초청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실패하고 무너지고 저주 가운데 헤매고 있을지라도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면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 약속하신 소망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간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는 듯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서 마침내 아버지를 기억했던 탕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황무지에서 불순종의 직면한 결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버지를 기억하고 돌아오면 언제든지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계속 반복되는 말씀은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기억하고 돌아오는 조건은 결국 신명기 전체에서 강조되는 그 “쉐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청종….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두손들고 회개의 자리로 돌아오기만 하면, 말씀을 붙들고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어떤 어려움에도 어떤 잿더미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청종하고 기억해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시며 새 출발 할 수 있게 도와 주신다는 그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면 품어 주시고 안아 주십니다.
그렇게 두손들고 돌아온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마음에 할례”입니다. 할례라는 것은 언약 백성의 표징으로 그 신체의 일부 표피를 자르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몸에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하심을 강조합니다. 마음의 할례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거며 내가 세상과 단절 됐음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마음의 할례를 하신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잘라내야 할 것을 다 잘라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마음에서 잘라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 어리석음을 잘라 내십니다. 내 마음의 완고함을 잘라 내십니다. 내 마음의 자아 중심성과 교만을 잘라 내십니다.  그렇게 마음에 내 살을 도려내 듯이 내 마음에서 제거해야 될 것들이 있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마음의 할례를 베풀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중심되는 삶을 잘라내고 하나님만이 중심되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오직 주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로서 마음의 할례를 베풀어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이 마음의 할례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내 실패와 무너짐의 자리, 불순종의 황무지에서 주님께 두손들고 나아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그리고 내 살을 도려내듯 내 마음 속에 제거하고 잘라 내야 될 것들이 있슴을 보게 하십니다. 내 마음의 자아 중심성을 잘라내야 합니다. 내 마음의 교만과 어리석음과 말씀을 망각하게 만드는 착각을 잘라내야 합니다.주님께서 내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며 내 마음에 있는 가시들, 쓴뿌리들을 제거하고 잘라 내시도록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비칠 때 내 마음에 이런 놀라운 할례가 이루어진다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않은 말씀을 내 마음에 담을 때 예수님이 내 마음을 환히 비춰 주시며 모든 것들을 제거해 주시며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내 마음의 모든 우상들을 깬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의 모든 그런 잘못된 것들을 잘라 내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할례를 통해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살아가도록 바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자꾸 무너집니다. 자꾸 실패합니다. 자꾸 주저 앉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기억하고 생각하지 못하며 망각하고 불순종의 길로 빠져 저주를 직면합니다. 이럴 때마다 오늘 말씀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만 돌아오면 다시 산다, 다시 기회가 있다는 그 말씀을 붙들고 나아오십시오.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우리로 회복시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내 마음에 이런 모든 것들을 잘라내며 순결한 모습으로 살도록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믿고 주님만을 바라보는데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며 다시한번 회복을 주시며 다시 한번 영광 가운데 우리를 쓰실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마음속 모든 불순물들을 태우시고 모든 잘못된 것들을 잘라 내시며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내 마음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게 할 그 능력과 힘을 주실 것입니다.


​새벽묵상 "이 땅의 황무함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라."
신 29,22-29 | 08-20-2020
오늘 말씀에서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삶을 살게 될 때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우리에게 차근차근 알려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지 못할 때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언약을 마음에 돌과 같이 새기지 않고 망각하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 불순종의 결과가 재앙과 저주 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마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2-23절을 통해 온 땅에 유행하는 질병과 기근의 황무함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할 경우 이런 일이 있다는 경고로만 받아들이면 안되고 이런 일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언약을 잃어버린 자기 자신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죠. 그러면 회개의 길로 빨리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어려움을 바라보고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이 무슨 뜻이냐?”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본 것이죠. 그 세상에 저주와 재앙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겁니다. 첫번째 불순종은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림”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우상에 절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나아가지 않은 것이죠. 이것의 결과가 바로 이 땅의 저주와 재앙이 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경고의 말씀에서 계속 반복이 나오는데 히브리 어법에서 반복은 강조합니다.  강조하며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단호하게 지금 경고하는 것이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살아가며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다른 우상들을 세우면 이런 일들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하나님의 뜻을 물어본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불순종과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자신의 현재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얼른 회개하며 돌아올 수 있어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너의 조상 1세대가 무너진 그 방식대로 똑같이 실수를 반복하며 자빠지지 말라는 그 안타까운 경고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경고하시는 거죠. 알람과 같은 경고장치를 잊지 말고 무너지지 말라고….
지금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멈춰져 있습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몇 달을 이렇게 숨죽이며 보고 있지 않습니까? 전세계가 멈춰 섰고 마비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성도들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 땅에 유행되는 질병, 바이러스를 보고 나의 불순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 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만큼 불순종 했는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 하지 않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함부로 파괴하며 살았는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기 위해 이 하나님의 경고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전세계를 휩쓰는 바이러스를 바라보며 이런 기회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 말씀으로 돌아가며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자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바라보며 지금이 회개할 때임을 믿고 고백하십시오. 말씀에 따라 다시 시작할 때임을 믿고 일어서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 이때가 회개의 때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이 시대의 어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새벽묵상 "하나님 소속을 분명히 할때 인생이 흔들리지 않는다."
신 29,1-21 | 08-19-2020
신명기 전체는 이스라엘 광야 2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가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알려주는 율법입니다.  신29장과 30장은 특별히 모세가 죽기 바로 직전에 했던 고별 연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 1세대가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가나안을 바로 코앞에 둔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한번 갱신하며 언약만을 붙들고 순종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 백성되게 하신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 여호와 하나님 소속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하나님 언약의 백성이라는 말은 결국 “내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고백, 또한 “나는 소속이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치 하시고 먹이시고 기르시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나의 주인이시다 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 이것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소속의 문제가 굉장히 중요해서 그 소속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그 identity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 소속인가가 분명하면 인생이 흔들리지 않는데 내가 어디 소속인 걸 모르면 인생이 불안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우상이 판치고 세상 문화가 너를 흔들때 너희는 하나님 소속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할 때 너희는 흔들리지 않고 세상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죠.
출애굽과 광야 40년의 모든 삶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속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백성됨을 알려 주는 수많은 계시와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광야에서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혀 주심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것을 체득하면서 하나님 소속임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일상 가운데 기적을 베푸시며 그들은 모든 기적과 이사를 매일 현재형으로 경험하게 하시면서 이것을 통해 너희는 내 백성이다…내가 너의 친히 하나님이 되신다….이 두가지를 분명히 붙들고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이 하나님 소속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고 하나님 안에 거할때 가나안에서 축복받는 비결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놀라운 기적과 이사,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눈에 보고 놀라운 기적과 이사들을 일상으로 보았지만 그것을 마음속에 담고 듣는 귀가 없었습니다. 보긴 보는데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없었다는 겁니다. 내 앞에서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지는 기적을 본다면 평생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만난 자로 살 거 같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매일 기적과 이사를 보는데도 마음에 진리를 담지 못해 결국 불순종하고 무너졌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기적을 매일매일 체험하면서도 하나님을 망각했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우상숭배하며 무너졌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너희가 누구 소속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하고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이것만이 복 받는 비결, 망하지 않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형통의 복을 허락하신다 약속하셨습니다. 하는 모든 일에 형통의 복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 형통의 복은 내가 원하는 소원, 내 뜻대로 모든 일이 술술 풀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는 모든 일에 형통의 복이 쏟아진다는 것은 나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주도하시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며 하나님과 함께함이 나에게 힘이 되고 능력됨을 선명하게 고백하는 것, 바로 형통인 것입니다. 그런 형통한 삶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초대하십니다. 내가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지탱되고 있으며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입히시고 먹이시는 축복가운데 살고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소속임을 분명히 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인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방식인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간 하나님의 백성임을 하나님 소속임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하나님 소속임을 분명히 할 때 인생의 기초가 흔들리지 않고 세상에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 가운데 내가 서 있으며 매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내가 살고 있음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언약의 말씀을 지키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능력이며 그 말씀이 지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힘과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 형통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오늘 하루 풍성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저주의 경고들은 하나님의 충격 요법이다." 
신 28,36-68 | 08-18-2020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말씀을 망각하게 되면 이런 저주가 임한다는 경고와 충격요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의 삶 가운데 거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강조법을 통해 보게 됩니다. 가나안 땅이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땅이었으며 하나님이 직접 싸워 이기신 전쟁을 통해 주신 은혜의 동산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고 은혜를 부어 주셔야 소생할 수 있고 곡식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들이 어떤 노력을 해도 그 땅에서 결실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 가나안에서 저주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 어떤 수고에도 불구하고 결실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간의 어떤 노력도 열매를 얻을 수 없음을, 인간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저주의 묘사들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고 불순종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건이 가나안의 풍족함 가운데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이 풍족하게 되니 처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풍족함과 풍성함이 계속되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더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게 된다는 것이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 섬기는 것이 아니라 풍족한과 풍성함, 성공이 교만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철저히 붙들었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시작했고 자기 자신의 공로, 자기의 라는 것이 전면에 나온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했으니까 이렇게 성공했다는 것이죠.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해서 소산을 얻게 되고 풍족하게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점점 불순종하고 말씀에서 떠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직면하게 되는 위험성입니다. 인간의 풍족함과 순탄함 가운데 계속 살다보면 안타깝게도 인간은 죄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나중엔 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서 결국 망각과 함께 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일이 순탄하게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없어도 나는 문제없을 것 같다는 착각의 빠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 있어서 가나안 땅에서 풍족하고 잘 살게 될 때가 오히려 영적으로는 더 위험한 때라는 것을 경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아주 구체적으로 길게 상세한 저주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저주의 긴 묘사들은 단순히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는 데 있지 않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범죄적 성향을 가지고 순종 보다는 불순종의 쉽게 나갈 수밖에 없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성을 미리 차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그들이 직면하게 될 암울한 미래를 저주와 함께 지금 들으면서 그들의 삶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매달리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죄성으로 말미암아 불순종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자각하라 경고하시는 말씀이죠. 그들은 하나님의 복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야 살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경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저주의 묘사들 가운데 충격 요법과 같은 최악의 예가 등장하는데 바로 자기 자녀를 음식으로 먹는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53절과 57절에 두번이나 반복해서 경고하십니다. 오죽 먹을 것이 없으면 자기 자식을 음식으로 먹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라는 것이죠. 자기가 나온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는 상상할 수 없는 비극,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도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축복과 정반대로 가는 이 저주의 상황을 경고로 받아들여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거울 삼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늘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복된 인생 그 복의 거하는 인생 살아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네 눈에 보이는 일로 말미암아 네가 미치리라."
신 28,15-35 | 08-15-2020
우리는 일상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까, 임하지 않을까에 관심이 많은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 하는가, 순종 하지 않는가에 관심이 훨씬 더 많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돌에 새기듯 내 마음의 선명하게 새기며 그 말씀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그 복 가운데에 머물게 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불순종 가운데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씀을 오늘 말씀을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1절-14절까지 수많은 복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나서 15절부터는 저주의 말씀이 시작되는 것이죠. 이 저주의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은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저주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하며 살아가면 그 결과가 저주라는 것입니다. 여러 저주의 경고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24 절에 등장하는 비 대신 모래와 먼지를 내리시는 저주입니다. 가나안 땅 이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셔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비 대신 먼지와 모래를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한국에도 요즘에 황사가 그렇게 유행이고, 미세먼지가 그렇게 문제입니다. 비가 와도 이상기후로 비가 하늘이 뚫린 듯 퍼부어서 수많은 곳에 물난리가 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연을 파괴한 결과이며 남용한 결과 라는 분명하고도 아픈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불순종의 결과, 인간의 욕심과 죄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엄중히 받아들이고 회개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네 눈에 보이는 일로 말미암아 네가 미치리라 (v. 34).” 정말 무서운 말씀이지만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일로 말미암아 지금 미치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은 하나님과 자꾸 싸워 이기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불순종하며 내가 어디까지 가는지 자꾸 내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대항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인생의 결과는 바로 미치는 인생입니다. 미쳐버리고 싶은 인생이지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저주들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불순종의 결과로 찾아오는 이런 비참한 인생들 그 인생으로 끝나길 원치 않습니다.
저주의 말씀들은 어떻게 보면 알람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저주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런 것들을 당해봐라 그리고 알려 주시는 게 아니라 이런 위험성이 있으니까 정신차리라는 경고, 알람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렇게 저주를 받게 되는 알람이 있으니 불순종 하지 말고 말씀 가운데 거하라는 것이죠. 말씀을 불순종한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에 저주를 분명히 기억하고 믿으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축복을 더 강조하기 위한 수많은 저주들의 나열, 뒤의 저주가 무게 중심이 아니라 앞에 나왔던 축복들에 무게중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강조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축복을 주기 원하신다는 것을 반대로 강조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백성들의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이 경고의 의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에게 순종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땅 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 버리고 하나님을 풀 순 욕하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미치는 것 뿐 임을 잊지 마십시오.이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말씀 안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손대는 것마다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비결"
신 28,1-14 | 08-14-2020 
신 28장은 복과 저주의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 27장 말씀을 통해 에발산과 그리심산이란 두 상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에서 복과 저주 사이에 선택을 하며 하나님의 복 가운데 머물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28장은 그 말씀의 연속으로 복과 저주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인 1-14 절은 하나님의 복의 대해서 증언을 합니다.
말씀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복을 받을 것,” “복이 임한다.” 입니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이 복받는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2절 말씀에 “모든 복이 네게 임한다.” 3절에 “복을 받고 복을 받을 것이며,” 4절에 “복을 받을 것이며” 5절에도 “복을 받을 것이며” 8절, 11절 12절 계속 복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3-6절은 개인이 일상적인 삶에서 누리게 되는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7절-14절 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로서 누리게 될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복받는 삶을 살기 원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의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되는 복받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복이 머무려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단 한 가지의 요건인 순종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죠. 다른 걸 요구하지 않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하지 않고 마음에 돌과 같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구체적인 복의 약속들을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은 삶의 모든 영역에 내린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그냥 한 부분만 하나님께서 복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을 내리심을 8절 말씀에서 “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심”으로 명확하게 표현하셨습니다. 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복이 내린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손대는 일마다 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대는 일마다 망하게 하고 안되는 그런 손들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손대는 것마다 복 받게 하는 복된 손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이런 말씀만 말씀대로만 되면 매일매일의 삶에 얼마나 행복과 감사가 넘치겠습니까?  손대는 것마다 복을 주시는 인생, 그런데 이런 인생의 비결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삶의 전 영역에서 순종하는 것이죠. 내 삶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망각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삶 모든 영역에 복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순종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말씀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모든 영역에 복을 주시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과 주일 한번만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 속에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 부어 주시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나 하나님께 삶의 전 영역에서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열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일 한번 나와 드리는 것도 대단한 헌신이자 순종이라 착각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간구는 있고 매달림은 있는데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삶, 하나님과의 동행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큽니다. 우리 성도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전영역에 하나님의 복을 열고 창고를 통해 손대는 것마다 하늘의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런 반복적인 복의 약속들을 바라보며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는 그 마음과 순종에 있다는 것이죠. 복에 초점 맞추지 않고 순종에 초점 맞출때 그 복은 우리 가운데 떠나지 않기 때문에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복을 진정으로 사모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삶의 전 영역에 동행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늘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순종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손대는 것마다 복 주시는 그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전 영역에 복을 부어주시기 위해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내 일상에, 내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믿고 고백하며 그 말씀을 지켜 행하고 순종하십시오. 그때 순종의 결과로 우리가 삶의 전영역에 복이 부어짐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비결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의 순종한 결과로 우리가 복을 받는다는 걸 잊지 마시며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며 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불순종하면 은혜의 땅이 저주의 땅이 된다."
신 27,11-26 | 08-13-2020
제가 군생활을 할때 훈련을 하게 되면 부대에서 아군과 적군을 서로 나눠서 한팀은 공격을 하고 한 팀은 방어를 하는 이런 모의 훈련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부대들은 좋던 싫던 훈련에서는 적군이 돼야 되는 그런 모의 훈련을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에발산에서의 저주, 그리심산에서의 축복이 등장하고, 그 산에 올라가는 여러 지파들이 등장합니다.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지파는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에 올라가고 나머지 지파들은 저주의 산인 에발 산에 올라갑니다. 이걸 보면서 그리심산에 올라가는 6 지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축복의 백성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지파라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두 산들에 지파들은 나누어 올라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에발산에 설 수도 있고, 그리심 산에도 설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는 임의적 구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그리심산의 축복이, 불순종하면 에발산의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축복과 저주가 이곳 저곳에 산에 나눠져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충실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과 약속을 망각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온 백성 앞에 구체적으로 그림언어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땅이며 약속의 땅이나 그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기 위해서는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며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땅과 저주의 땅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그 은혜의 땅에 하나님의 약속이 머물면 복의 땅이 되는 것이고, 그 은혜에 땅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망각하고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언약의 붙어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되면 그들은 이런 저주가 임하는 땅에 살게 되는 거고, 반대로 하나님의 언약의 붙어있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될 때 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계속되는 저주받는 예들의 대부분이 십계명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들입니다. 15절은 우상숭배 계명을 어길때 찾아오는 저주이며, 16절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길때 찾아오는 저주입니다. 24-25절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길때 찾아오는 저주입니다. 여기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바로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무려 20절에서 23까지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죄, 짐승과 교합하는 죄,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죄, 장모와 동침하는 죄, 이런 패륜에 가까운 일들을 구체적으로 금지 조항과 함께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경고하셨다는 것은 가나안 땅에서 그 당시에 이런 일들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만연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의 간음하지 말라는 이 계명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적용이 되는가 하면  짐승과 이런 교합을 하는 이 모든 것들 까지도 간음하지 말라는 경고를 따로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그 세상 기준으로 살아 타락하게 되면 망하는 인생을 살게 되고, 그 축복의 땅이 저주의 땅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산과 저주의 산이, 축복의 삶과 저주의 삶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것은 두개의 다른 산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게 될 때 그 땅이 은혜의 땅인 그리심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망각하고 불순종하면 그 은혜의 땅 그리심산이 저주의 땅 에발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가 헌신하는 교회, 우리가 머무르며 살고 있는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에 땅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십계명의 정신인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으로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은혜에 땅에 은혜가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망각하게 되면 그 축복의 땅이 저주의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가정,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교회,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땅이 그리심산이 되어야지 에발산이 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머무는 그리심산 이 되기 위해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키고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가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이죠.은혜의 땅을 계속 은혜에 땅으로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말아야 되며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망각하지 않으며 순종하며 축복에 머물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이 땅은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땅이다."
신 27,1-10 | 08-12-2020
오늘 말씀은 요단강을 건너가서 너희가 모든 전쟁을 승리하게 되면 두 가지를 돌로 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돌에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돌로 새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돌에 글씨를 새겨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돌에 이름 세자 쓰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세글자를 새기는 것도 아마 하루종일 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종일 이름 세 자를 돌에 새기면 그 이름을 새기는 내내 마음속으로는 이름을 수백번 수천번을 생각하며 돌에다 내 이름을 새기게 됩니다. 말씀들을 돌위에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기록하는 이 명령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로 선명하게 새겨야 되는지를 알게하시는 겁니다. 돌에 말씀을 새기는 그 과정과 같이 돌에 새겨지는 것보다도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마음에 새기라는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절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라…이것을 명령하신 것이죠. 어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백성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이 바로 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는 일이라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마음속에 절대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 명령은 제단을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들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의 제단을 쌓는데 그 제단은 어떤 연장도 사용하지 않은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들다는 겁니다. 새 연장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의 피를 흘리는 데 사용하는 무기, 그렇게 날카로운 걸로 사람을 죽이는 무기인데 그런 새 연장이 전혀 사용되지 않은 다듬지 않은 돌로만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아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 있어서 사람의 피가 흘려지지 않은 돌이자, 인공의 아름다움이 가미되지 않은 돌입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어떤 모양에 신경쓰지 말고 오직 영과 진리로 주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 라는 것을 명령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꾸며지지 않고 가려지지 않고 순수하고 온전하게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들어진 이 제사를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만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억하며 마음에 새기는 자리가 예배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은 제단, 돌에 새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분명한 메세지를 주기 원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천국간다는 의미도 분명히 있지만 더 광의적인 의미로는 내 삶에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가지고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 간다는 것은 내가 이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순종하는 삶을 고백하며 하나님과 함께 영적인 전투를 벌이는 곳이 바로 가나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믿고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언제만 예수님을 찾는가 하면 내가 필요할 때만 찾습니다. 내가 아쉬울 때만 예수님을 찾고, 내가 위급할 때만 달려와 살려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위급할 때만 하나님한테 오고, 예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안에 있음을 믿고 고백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통치하셔서 나를 붙잡아야 되는 땅이 되는 겁니다. 돌로 새기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듬지 않는 돌 위에 드리는 제사를 통해 무엇을 명령하시는가 하면 “이 가나안 땅은 니 힘으로 살아가는 땅이 아니라 내 힘으로 살아가는 땅이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시는 겁니다.  니 힘으로 승리하는 땅이 아니라 내 힘으로 승리하는 땅, 네 힘으로 곡식의 열매를 맺는 땅이 아니라 내 힘으로 곡식을 맺는 땅 이라는 거예요. 이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승리하는 곧 그것이 바로 가나안 땅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땅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는 땅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을 때 그 삶이 복된 인생임을 잊지 마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하나님 은혜를 망각하면 내 인생밖에 안보인다."
신 26,12-19 | 08-11-202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어떻게 나누고 누리는가에 우리에게 배우게 하십니다. "세째해 십일조를 드리는 해"라는 말이 12절에 등장하는데 십일조 에는 크게 3가지의 용도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십일조는 레위인들을 위한 것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득의 1/10을 드리는 것을 통하여 기업을 받지 못한 레위인들, 성전 봉사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의 생활을 위해 사용하게 하셨지요. 또한 가족을 위한 십일조로 감사제를 드린 후 가족과 함께 먹고 나누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용도로 십일조는 바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나눠서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줘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명령하신 것입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는 그 당시에 소위 말하는 가장 어려운 소외된 대표적인 이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있지 않고 살아갑니다…라는 증거로 이렇게 그 당시에 소외되고 있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도 함께 먹을 것을 나누고 배부르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보이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15절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들은 지금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며 무슨 기도를 했냐 하면 이스라엘과 함께 사용하는 그 땅 가나안 땅의 복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복만을 위해 나만의 복만을 위해 기도한 게 아니라 우리 이스라엘 공동체의 복을 달라고 기도한 것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알려 주셨을 때도 나의 일용할 양식을 놓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놓고 기도하게 하신 하늘나라의 정신입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나만 문제가 없으면 기도가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채워질 때까지 함께 기도하며 함께 부르짖으며 함께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영적 공동체의 특징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나만을 위해, 내 가족만을 위해, 복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넘어서
교회 공동체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하나님의 복이 머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17절 말씀과 같이 “그의 소리를 들으라”를 명령이 마음에 담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뭐가 들리는가 하면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의 소리가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내 눈에 하나님의 임재가 보이는 것이죠. 내가 영적인 이스라엘로 내가 누군가 하는 정체성의 질문은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소리를 청종하며 하나님의 소리를 내 마음에 담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쉐마…들으라 이스라엘아의 신명기 정신을 실천하며 광야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원리이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야 되는 하나님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되면 나의 인생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필요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마음에 담긴 성도들은 내 인생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 들도 보이게 되며 더 중요한 것은 내 인생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그것은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함께 기뻐하며 함께 배부르도록 도와주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면 내 인생과 삶이 보임과 동시에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삶이 보이게 되는 것이며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보이는 기적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성도들의 차별성과 거룩한 삶임을 잊지 마시고 내 삶과 내 문제와 내 어려움과 내 축복만 보이는 인생에서 다른 사람의 필요가 보이며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눠주는 것은 그 놀라운 삶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 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나의 기도가 공동체 전체의 복을 내려 공동체 전체가 복을 받게 기도하며 간구하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을 때 우리의 기도가 더 깊어지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는 놀라운 은혜 그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이 된다는 걸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내가 땀흘려 일한 결과, 사실은 은혜의 선물이다. "
신 26,1-11 | 08-08-2020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되면 그들이 수확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광야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하늘에서 주시는 은혜의 식량을 먹었던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농사 수확의 첫 번째를 하나님 앞에 가지 오는 것은 굉장히 영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마치 자녀들이 성인이 돼서 처음으로 직장을 잡고 일해서 번 첫 월급을 부모에게 가져올 때 그 느낌이 얼마나 흐뭇할까….하는 느낌과 비슷한 듯 합니다. 태어난게 엇그제 같은데 이제 다 커서 스스로 이렇게 번 첫 월급을 가지고 왔구나…그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그 감격적인 첫 열매를 반드시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제물로 드리라는 것을 명령하신 게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감사와 고백에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가져올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 곡식을 거둬 하나님께 드릴때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땅을 우리가 들어오게 됐다” 고 고백하며 그 재물을 드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냥 곡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열매 주셔서 감사합니다…이러면 될 것 같은데 굳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열매 가지고 오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땅을 주신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첫 곡식을 하나님께 가져와 드리는 감사는 그 곡식을 맺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뿐만 아니라 그 곡식이 자라게 하는 그 땅, 그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첫 열매에 대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정착하고 받게 된 땅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선물이고 은혜 소산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땀 흘리고 열심히 일해서 곡식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고백은 하나님이 그 첫 열매를 맺게 하신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은혜에 땅에서 은혜에 결과로 나온 선물임을 고백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중요한 겁니다 첫번째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통해 첫 번째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통해 가장 귀하고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백이자 내 전체를 드린다는 것을 고백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 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 소산을 내가 먹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림으로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기억하는 것 이게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라는 것은 결국 내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존재인지를 기억하는 것이고요.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수많은 것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하고 고백하는 것이죠. 우리의 고백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은혜 소산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볼 줄 아는 자는 영적인 눈이 때인 자이며 내 인생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자입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내가 똑똑하고 내가 잘해서 내가 돈 많이 벌고 내가 사람들에게 베풀고 산다 생각합니다만, 그 모든 출발이 나로부터 시작된다면 이것은 결국 자기의, self-righteousness며 결국 자신을 무너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내가 열심히 땀흘리고 내가 열심히 주먹쥐고 살아서 나온 결실이라고만 믿는 것은 어떻게 보면 1차원적인 생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이 있으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들이 있으며 하나님의 매일 공급하시는 은혜가 있어서 내가 거두게 된 것을 고백하는 자, 그가 신앙 고백이 담긴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고백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는 모든 복과 모든 기쁨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죠. 그 모든 출발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셔야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고백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과 저의 고백 되길 원합니다. 나의 일상의 모든 삶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가져야 될 참다운 자세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눈속임으로 소탐대실 하지 말라." 
신 25,11-19 | 08-07-2020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 사이의 대화로 해결되지 않아 재판을 하게 되는 시시비비를 가릴 때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10-12절에는 싸움 중에 여인이 상대방 남자의 음낭을 잡으면 손을 자르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런 것까지 명령으로 주셔야 했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손을 자르라는 것, 이건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면 명령으로 주셨을 이가 없는데 명령으로 주신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던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여인이 남편을 구하기 위해 음낭을 잡을 정도면 그냥 살짝 스친게 아니라 엄청 세게 잡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남자의 음낭을 유부녀가 세게 잡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남자의 인격 모독이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자녀의 생산을 불구로 만드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막는 것이 되는 것이죠. 즉 약속의 후손을 통해 이 놀라운 은혜를 받게 하는 그 자녀 생산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런 강력한 명령을 주신 겁니다. 어제 말씀에 그 형제의 자녀가 없을 때 그 형수를 데려다가 자녀를 생산하게 기업 무를 자가 될 것을 명령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 그림 안에서 이해해야만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의 정의는 공정하게 저울추와 되를 사용하며 살라는 명령입니다.  수천년 전에도 두 종류의 저울과 되를 가지고 눈속임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죄성의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원산지 눈속임, 제조일 눈속임, 저울추 눈속임 등등을 통해 부당이익을 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눈속임을 해가지고 그냥 더 크게 더 많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게 옛날에도 지금도 만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두 종류의 저울추와 되가 일반화되고 보편적인 이 세상에서, 그렇게 안하면 장사 못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내부의 정당화이론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을 추와 되를 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의라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계속 눈속임을 하는 자들은 16절 말씀을 보면 악을 행하는 자이며 하나님께 가증한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의 차별성은 우리의 범죄는 사람들을 향한 범죄만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 가증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며 온전하고 공정한 신뢰받고 믿음직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온전한 저울추 와 온전한 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바른 정의를 붙들고 살때 그 삶에 하늘의 복이 내려오고 하나님의 복이 그에게 머무는 축복된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단기간에 눈에 보이는 어떤 이익을 포기할 지라도 큰 그림으로 내 삶에 하나님이 주신 온전하고 공정한 방법을 따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방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의 정의는 바로 아말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17절과 19절에 반복하여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말렉을 그렇게 지워 버리리라 했으며 항상 아말렉은 진멸해야 하는 민족이 되었는가? 아말렉이 한 일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이후에 직후에 한 악행입니다. 출애굽 하고 광야에 들어가 지쳤을때  그 틈을 타서 첫 번째는 뒤에서 공격을 했고요, 두번째는 약한자들을 공격했습니다. 이것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자마자 …라는 것은 성도들이 구원받자 마자입니다. 구원받자마자 광야에서 아말렉이라는 원수가 공격하고 흔드는 겁니다. 성도들이 지치고 피곤할 때 그 틈을 타 뒤에서, 약한 자들을 흔들고 공격하는 겁니다. 이것을 여러분 영적 전쟁이라는 큰 그림에서 이해하면 아말렉을 진멸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늘 피곤하고 지칠 때 나를 뒤에서 공격하는 나의 약점을 공격하는 아말렉의 흔듬이 있음을 잊지 말고 끝까지 손들고 싸우고 언제나 진멸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끝까지 없어 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성도들을 끝까지 흔드는 아말렉이라는 영적인 공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 있어서 초대 왕이었던 사울왕의 실수는 굉장한 큰 실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선 사무엘의 입을 통하여 사울왕에게 아말렉을 치는데 완전히 진멸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반쪽만 지키며 전쟁에 승리하기는 했는데 진멸하지 않고 좋은 것은 남겨 두었지요. 결국 이것 때문에 사울왕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적으로 깨인자와 깨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아말렉을 절대 가볍게 보면 안되고 아말렉에 공격은 언제나 구원 받은 성도들이 피곤하고 지칠 때 뒤에서 공격하며 흔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아말렉을 방치하고 완전히 진멸하지 않을때 직면하지 않을 때 결국 아말렉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너진다는 것을 잊지 말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공의…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실천이다."
신 25,1-10 | 08-06-2020
인간의 삶 가운데는 살다보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문제가 대화로 해결 안될 때가 있다는 것이죠. 서로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기에 갈등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그렇게 시시비비가 제 삼자 전문가에 의해 가려져야 하는 재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기는 이유는 바로 이해관계 와 이해득실에 따라 항상 바라보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이서 해결할 힘이 있으면 재판이 필요하지 않겠죠. 그런데 이해 관계가 상반 될 때 서로의 입장을 좁히기 어렵기 때문에 재판장에 와서 재판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을 통해 재판이라는 것은 인간의 죄성에 따른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한 죄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재판하는 것을 통해 해결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관계를 재판으로 풀때, 인간들 사이에 해결할 힘이 없어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재판을 할때, 하나님께서는 재판장을 통해 공정과 정의가 흐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즉 재판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치우치지 않게 하는 것, 하나님 앞에선 자로 재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재판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차별성이 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차별성은 재판 없이 사람들끼리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서 차별되는게 아니라, 죄된 인간으로 재판을 통해서만 시비를 가려야 될 정도로 연약한 인간들이지만, 그 재판 앞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재판으로 서는 것, 하나님을 의식하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차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의인을 악인으로 재판하는 것은 단순히 잘못된 재판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미움받는 재판,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는 악한일이라 선언하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붙들고 한 재판, 바르게 그렇게 판결한 것에 대해서는 악인에게 그 죄의 알맞는 매질을 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매질을 40대 이상은 넘기지 않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40대 넘게 때리면 불구가 되거나 죽을 확률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죄자 라도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짓지 않았다면 40대 이상 태형은 금지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여러 번 맞았다고 증언하는데 그 태형이 바로 이 율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죽지 않을 만큼만 사도 바울이 맞은 겁니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런 태형을 맞은 것이죠.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시시 비비를 가리는 재판정에서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는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행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허락하신 진리와 정의를 세우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공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실천으로 등장하는 예가 대가 끊어지지 않게 기업무를자를 태어나게 하는 관습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자손을 통해 특별히 그 아들의 큰 아들을 통하여 집안을 통해 전수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잘 보존해서 대 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 가느냐 이어가지 못하는가가 집안의 명운을 거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 제도를 우리는 기업 무를 자… 혹은 고엘제도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면 큰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형수 랑 그 사이에 아들이 없이 죽게 되면 그 형수를 다른 아들이 아내로 맞아 형의 후사를 낳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대를 잇게 하는 것이죠. 그것이 오늘 말씀에는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에 홀로 남겨진 과부는 홀로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 뿐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 축복이 계속 이어져야 했기 때문에 그 아들을 갖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8장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관계를 가져서 아이를 낳는 것 이것은 지금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일이고 비윤리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이 다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오늘 말씀의 이 기업 무를자의 그림에서 봐야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업 무를자의 책임을 다말에게 하지 않은 유다와 그 가족은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신벗김 받은 자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집은 침을 뱉고 모욕하라 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가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유다와 그 아들들은 다 말에게 이 의무를 하지 않은 것이죠.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그 집안에 대해, 다말은 적극적으로 행동에 오히려 기업무를 자의 대를 잇게 되는 놀라운 일을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으로는 이런 구약의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은 이런 말씀들을 주신 중요한 이유는 결국 이 모든 대가 끊어지지 않으며 기업 무를자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갖는 것은 결국 이것이 궁극적으로 기업 무를 자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모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자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기업 무를 자로 구원과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메시아가 되기 때문에 구약의 이런 모든 이해하기 어려운 제도들이나 명령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업무를 자로 오신다는 이 큰 그림 안에서 재해석 되고 우리에게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선의 가시와 같은 말씀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큰 그림을 통해 나중에 이해되는 많은 것들도 있음을 바라보며 말씀이 나를 해석하며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그 깊은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는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약자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 
신 24,6-22 | 08-05-2020

목회를 해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돈 문제 때문에 어려워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단순히 돈이 없거나 필요해서 어려운 게 아니라 돈을 빌려주고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돈 잘못 빌려줬다가 돈 한번 잘못 빌렸다가 서로 등 돌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이렇게 돈을 빌려주고 빌리는 문제로
문제가 많았지만 수천년 전에 그 옛날에도 이 돈 빌리고 돈을 빌려주는 문제로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돈을 빌릴 때 전당물을 주고 받는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이런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많이 있었고 이런 돈 빌리고 전당을 맡기고 가지는 과정에서 서로 멱살잡는 상황이 많았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많은 부분은 이 돈을 빌려주고 빌리는 문제에 대한 규례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전당잡힘은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흔하게 보였던 전당포라는 가게가 떠오르게 합니다. 전당포는 그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사람들, 서민들이 정말 절실하고 돈이 급할 때 자기가 집에서 아끼는 물건 같은 것을 가지고 가면 그 물건의 가치에 따라 그것을 맡기고 돈을 빌려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간에 돈을 갚지 않으면 그 물건을 전당포 해서 처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전당포에서 받는 물건들은 가치가 있고 비싼 물건들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천년에서 전당을 잡히며 가난한 사람들이 급전을 많이 이용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돈을 빌리기 위해 전당을 잡힐 때 잡지 말하지 두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맷돌이고 또 하나는 외투입니다. 이 맷돌이라고 하는 것은 곡식을 갈아 가루로 만들어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맷돌을 저당 잡히면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맷돌을 저당 잡히면 그 가족들은 다 굶어야 되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생명과 직결된 이 맷돌은 저당 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중요하나 생존에 필요한 도구까지 전당 잡지는 말라….이게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미짝도 전당 잡지 말라 명령하셨는데 미짝은 잠잘때 덮고 자는 외투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불 대신에 이 겉옷을 덮고 자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은 이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불을 뺏어서 전당 잡히지는 못하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불을 빼앗기면 잠을 잘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직접적으로 이런것은 전당 잡지 말라는 거죠. 또한 전당을 잡을 때 채권자가 채무자 집에 들어가서 그것을 가져오지 말라…명령하셨습니다. 한국에서는 채권자들이 채무자의 집에 막 들어와 다 빨간 딱지를 붙여놓는 것이 인생의 큰 멍으로 자리잡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채권자가 밖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돈 빌리는 사람이 전당물을 가지고 나올 때까지 밖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힘으로 빚진 자의 집에 들어가서 빚쟁이가 막 갑질하면서 가지고 가는 이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아무리 돈을 빌리고 가난하고 남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함부로 인격 모독 하거나 수치를 당하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에게 돈을 빌리는 사람들에게 인격을 짖밟지 않으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하지 말고 학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부에게 전당을 잡지 말라는 명령이라던지, 나그네나 객에게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명령 모두 약자들을 짖밟거나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내세울 게 없고 의지할 걸었고 맞아줄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을 학대하지 말고 신앙 공동체가 적어도 이들을 배려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적어도 그들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존엄함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품고 그들을 함부로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것을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린 이 세상을 살며 밝고 밝히는 문화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음이 멍들고 마음이 상한 자들이 너무 많은데 그때 사회적 약자가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고 그들을 배려하며 그들을 품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주님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이 신앙 공동체의 그 기본적인 질서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귀한 신앙 공동체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이웃을 긍휼히 여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신 23,15-25 | 08-01-202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두가지 방편을 알려주셨습니다. 첫번째는 주인을 피하여 도망친 종을 외면하지 않음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내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못본 체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노예가 되는 경우는 대부분 돈을 갚지 못해 몸으로 때우기 위해 종이 되는 경우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자에 대한 규제가 없었죠. 돈을 빌리고 고금리로 매기게 되면 그것을 못 갚고 결국 노예나 종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피하여 온 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 다음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 끼리는 이자를 주지 말고 받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그 당시에 고금리로 인한 폐해와 그로 인해 노예가 되는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을 지키며 가나안 땅에서 살기 원 하셨는데 그 율법의 정신이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며 그것이 일상에서 선교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학대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그들의 긍휼히 여기며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주인을 피해서 도망 나왔으면 그 학대가 얼마나 심했으면 도망을 쳤을 까 하는 긍휼히 여기는 생각을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도망친 종은 잡혀 주인에게 끌려가면 돌아가면 100%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각오하고 목숨걸고 도망쳐 나온 것이죠. 이렇게 도망쳐 나온 종을 무시하지 말고 그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보호하라는 것이 바로 구별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계십니다.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종들을 학대하지 말고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잘 보호 하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재형으로 마음에 새기기 원하는 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전에 종으로 살았던 그때, 억울한 위치에 있었던 그 학대받던 시절을 잊지 말라고, 개구리가 올챙이적 잊지 말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겁니다. 너희는 얼마전까지 종으로 살았다는 거, 그 종살이 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그렇게 도망쳐 나온 종을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억압을 피해서 도망쳐 나왔기 때문에 그 자신의 과거의 삶을 기억하며 이렇게 주인을 도망쳐 나온 종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기억하며 불쌍한 자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냥 그들이 안됐다..하는 마음만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시지 않았으면 내가 저런 인생을 계속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현재형으로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붙드는 통로로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두번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방법은 도움받는 입장이 되었을 때도 도움 주는 자의 입장을 살피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을 때 포도원에 들어가 포도는 배불리 먹되 담아오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곡식을 따서 배불리 먹는 것은 되는데 곡식의 낫은 대지 말라는 것이죠. 도움 주는 사람의 넉넉함으로 땅에 들어가서 포도를 먹는 것도, 곡식을 따 먹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기에 이렇게 도움을 받는 것이죠. 그 베풀어주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도와주는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너가 부당한 이익을 채우는 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배고픈 너의 배를 채우기 위해 배불리 먹되 그 곡식을 베어 나오면 그것은 그 주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포도는 마음껏 먹되 포도를 그릇에 담아 가지고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도움 받는 사람들도 분명한 자신의 한계와 boundary가 있음을 명령하시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방편이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 하나님의 기쁨의 향기가 나타나는 세상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삶이 되기를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좀 더 많이 받은 사람이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넉넉한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될때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며 권리가 아닌 은혜임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일상을 살아가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늘 마음에 새기며 이 말씀을 붙드시고 늘 긍휼 하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사람들이 저주한다고 저주가 임하는게 아니다."
신 23, 1-14 | 07-31-2020
오늘 말씀을 통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알려주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총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땅에 하나님이 택한 거룩한 백성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구별되며 성결하게 살아가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하고 구별됨은 인간이 거룩하고 구별된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 곳에 계신 하나님이 거룩하고 구별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총회가 아니라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는 조건입니다. 그래서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고백하는 자, 여호와만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구별된 존재가 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은 바로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입니다.  그들이 들어올 수 없는 이유는 애굽에서 나올 때 빵과 물로 그들을 맞이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발람의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저주를 하나님이 복으로 바꾸셨습니다. 이걸 통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냐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들이 저주한다고 저주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욕하고 손가락질 한다 고 저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압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저주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곳이면 그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저주하고 손가락질 했다고 그것이 저주받고 손가락질 받는 공동체가 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사람들을 조심하고 신경쓰는게 필요합니다만 주님의 몸된 교회는 사람들이 저주하고 비난하고 손가락질한다고 저주를 받는 곳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복도 저주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에게만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사람들의 비난에 초연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의 축복을 늘 민감하게 생각하며 사람들의 모든 것들을 상대화 하는 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앞두고 그 백성들이 먼저 성결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대장 되시고 하나님이 앞서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이기에 그 백성들이 부정한 것을 제거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붙드는 싸움입니다. 거룩함과 구별됨 을 붙들지 못하면 하나님의 군대로 써 자격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군대로 서 그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는 것 중에 두가지가 등장하는데 배설하는 거와 그리고 남자의 몽정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여성의 생리 자체를 부정하게 여기지 않았듯이 남성의 몽정 자체를 부정하다고 보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게 여성의 생리가 됐던 남성의 몽정이 됐던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것을 부정하게 봤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 대변에 대한 부정함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의 배설물이 나쁘다 더럽다 부정하다....라는 말이 아니라 바로 몸에서 나온 것이 부정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작은 삽을 들고 가 밖에서 구덩이 파고 그것을 보지 말고 덮으라는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냄새나는 더러움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더럽다는 것을 계속 알려 주시는 겁니다.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게 부정하다는 것을 통해 인간 자체가 부정하다는 것을 계속 우리에게 리마인드 시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군대로 써 우리는 거룩한 싸움을 싸우기 때문에 내 몸이 가능성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늘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능성 없는 존재이며 그 인간이 나오는 그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더러울 수 밖에 없는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 살아가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덮이고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거룩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백성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신앙생활 잘하고 내가 태생이 좋아서 내가 열심히 살아서가 아니라, 매일매일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럽고 부정하다는 것을 처절히 인정하며 그리스도의 의로 덮였을때만, 그 분의 보혈로 덮였을때만, 나는 의로운 자라는 것을 잊지 말고 늘 내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 다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 존재라는 것을 내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부정하며 내 자신이 부정하며 나는 오직 은혜로만 사는 존재라는 것을 늘 깨닫고 살 때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묵직한 하나님의 확성기 음성이라 믿습니다







새벽묵상 "기준을 낮추면 물들어 망한다"
신 22,13-30 | 07-30-2020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문화와 구별되고 동화되지 않는 삶의 대표적 예로 십계명에서 주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켜야 되는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룬 가정은 그 가정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는 토대가 된다는 것, 그렇기에 가정이 잘 되는 것이 바로 공동체가 잘 되는 것이라는 분명한 연결 의식이 있었습니다. 신명기 배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애굽 문화가 몸에 익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를 광야에서 그렇게 배웠지만 400년 이상을 애굽에서 그 문화에 동화되어 살았기 때문에 애국 문화가 익숙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 공간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문화를 내린 그 우상 숭배와 세상 가치가 만연한 땅이라는 것이죠. 애굽 문화는 가나안의 문화와 비슷한 점이 많아 쉽게 동화되고 하나님을 떠나 무너질 가능성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특별히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지나친 오픈 문화의 동화되면 완전히 망한다는 것이죠.
가나안 땅의 문화에는 간음이라는 죄 자체가 없었습니다. 모든 게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 아래 정당화되었던 곳입니다. 성적 타락과 방종이 너무 만연해서 이런 문화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가정이 거룩함과 순결함 가운데 세워진다는 원리를 붙들고 간음하지 말라는 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시대착오적이며 그 땅에서는 지키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게 바로 처녀의 표와 자리 옷에 대한 얘기입니다. 14-15절에 등장하는 결혼 전 순결에 대한 이야기… 요즘에는 남녀 모두 할거 없이 결혼 전에 그냥 혼전 성관계를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시대입니다. 그게 큰 문제나 흠이 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죠. 혼전 성관계가 너무나 당연했던 그런 가나안 땅의 문화를 숨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혼 전까지 그 성적인 순결함을 지키는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문제는 남자가 “비방 거리를 만들고 누명을 씌우기 위해” 그것을 가져왔다는 거죠. 신약성경의 보게 되면 요셉이 아내 마리아 가 결혼 전에 임신한 것을 발견하고 조용히 끊으려 있습니다. 물론 그게 나중에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거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 당시에 자기 눈에는 아내의 부정을 발견한 건데 그것을 비방 거리를 만들지 않고 조용히 끊으려 했던 요셉의 신실한 마음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요셉의 행동과 정반대의 상황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비방 거리를 만들고 누명을 씌우기 위해 내가 결혼한 여자가 처녀가 아니다… 라는 것을 지금 가지고 온 거죠. 결혼하고 나서 어떤 이유든 간에 이 여인을 쫓아내려는 아주 나쁜 의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함과 비방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고대사회에서는 여자가 꼼짝없이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증거도 없지요…여성은 법적권리와 소리를 낼 수 없는 사회였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억울하게 모함당하는 여인을 보호할 수 있는 작은 장치를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처가집 가족을 통해 목소리를 내도록 말입니다. “자리옷”을 장로들에게 보이며 자신의 딸이 처녀임을 증명하게 되는데, 여기서 자리옷이란 결혼 첫날밤 한번도 관계를 맺지 않은 여자가 최초의 성관계를 맞으므로 생기는 혈흔의 자리입니다. 이것을 혹시 몰라 처갓집 부모가 챙겨 두는 겁니다. 남자가 엉뚱한 소리 할 지 모르니까 이걸 챙겨 두는 거예요. 이렇게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여성의 부모에게 우리 딸은 문제가 없다….반론의 기회를 주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결백이 입증되면 고소한 남자를 태형에 처하고 은 200세겔의 벌금을 물렸습니다. 이걸 통하여 평생 이 여자를 버릴 수 없는 아내가 되며 무고로 인해 실추된 아내와 처가집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겁니다.
그 말씀 뒤에는 구체적인 간음과 연결된 금지 조항들이 계속 나오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의 큰 특징은 바로 간음하지 말라 는 계명을 얼마나 구체적이고 강력하게 지켜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당연했던 그 문화, 성적 방종과 타락의 문화에 결코 물들지 말고 거부하라는 그 큰 그림 아래서 봐야 합니다. 이런 예들은 가나안 땅에서는 로맨스로 여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성적 표현이자 자유였던 일들입니다. 남자와 약혼한 후 성읍에서 만나 동침하는 일….유부녀와 동침한 남자….이런 일들이 있을 때 남자와 여자 모두 끌어내 돌로 쳐죽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회에서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엄벌에 처할 일이었다는 것 알려주시는 경고이자, 기준을 낮추면 동화되어 망함을 선언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이 십계명의 율법은 우리가 영적으로도 순결을 지키며 영적인 간음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개인적인 그냥 성적인 윤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성적인 범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를 무너뜨리게 만든다는 것이죠. 가나안 땅은 우상숭배가 만연 했고 그들의 성적 타락과 방종은 제사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예배 중에 극도의 성적 타락과 쾌락을 추구했던 그들의 예배에 물들면 결국 가정을 파괴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파탄으로 몰며 하나님을 떠나 망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의 어떻게 보면 잔인하게 돌로 쳐죽이라는 여러가지 예들은 단순히 성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잔인한 벌을 얘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준을 낮춰 동화되어 망하는 이스라엘 공동체, 예배가 무너지고 영적 간음으로 이어지는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에 대한 처벌임을 바라봐야 합니다.
가나안의 문화를 숨쉬고 살아가는 그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때 이 순결함 그리고 구별됨 을 가지고 하나님의 한 분만 섬기며 믿음의 바 대상으로 바라보는 그 명령은 영혼의 순결, 육체의 순결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싸워야 되는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이죠.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시대에 이런 순결이 점점 중요해지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란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다 합리화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의 순수성,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가정이 사는 비결이며 우리 영적 공동체가 사는 비결임을 잊지 말고 싸워야 할 영적 전쟁 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걸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풍성 이 머물게 되며 우리를 통하여 놀랍게 임하시게 될 것입니다.





새벽묵상 "못본체 하지 말라."
신 22,1-12 | 07-29-2020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됐을 때 그 이웃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가를 1절부터 4절까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못본체 하지 말라”는 것을 통해 강조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이런 어려운 상황을 구체적으로 예를 주시며 그 상황에서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못 본 체하지 말라”의 전제는 “보거든” 입니다. 보게 되면 못본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까닭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세상에 문화와 가나안의 문화 가운데 젖게 되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희미해지고 극도의 개인주의가 판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개인의 의와 목적을 위해 어떤 것도 희생 해도 된다는 문화에 젖는 겁니다. 그런 개인주의 폐해는 바로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보고도 외면하는 주변사람들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거반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못본채 하는 것을 가장 실감나게 묘사한 것이 바로 그 비유입니다. 처음 두 사람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와 합리화가 다 있었습니다. 들어보면 그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다는 것이죠. 이유없고 핑계 없는 외면과 못본채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도는 이 세상에 이웃들과 내 주변 사람들의 눈물과 아픔과 어려움을 보게 됩니다.  그 보게 될 때 못 본 체하지 않고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을 붙드는 계명의 정신이자 공동체를 세우는 정신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40년을 광야에서 살며 그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공동체로 서로 끈끈하게 같이 뭉쳐 살았던 운명공동체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질서와 문화에 젖어 개인주의를 통해 이 공동체가 무너질 위험성을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못 본 체하지 말고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어려움을 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다 움 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나에게 맞는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고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내면 보다는 겉모습을 보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게 현실입니다. 제복을 입으면 군인 같고 도복을 입으면 무인 같고….눈에 보이는 옷을 토대로 상대방의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여인에게서 난 자식이어도 처음으로 태어나면 장자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통해 이 세상에 나오는 순서가 전적인 하나님 소관, 하나님 주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을 배웠듯이, 이 세상에 남자 여자로 나오는 것 또한 하나님이 창조와 주권으로 주신 것임을 순종으로 받아들인 게 피조물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에 순종하며 창조 질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말씀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옷을 입지 말라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해보면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있는 우상숭배 문화와 전쟁문화에 대한 거절가운데 나온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 의복을 여자가 입지 말라는 의미의 “의복”이란 단어는 그냥 옷이 아니라 군복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금지하신 명령은 여자에게 남자 군복을 입혀 전쟁터에 내보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는 전쟁에 사람이 모자라니까 아이들도 여인들도 옷입혀 전쟁에 총받이로 내보내는 것이 만연했습니다. 그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도 중동의 국지전하는 곳들을 보면 여성들과 아이들이 총받이로 나가는 일이 흔합니다. 성인 남자만이 아니라 어린아이나 여자들도 좋든 싫든 그냥 전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나면 여성들이나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죽게 되는 것이죠. 수천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군장을 채우고 군복을 입혀 전쟁터에 내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호하게 하셨습니다. 반대로 남자들에게 여자 의복을 입지 말라는 “의복”의 의미는 가나안 땅에서 다산을 위해 우상숭배 때 입었던 그 의복을 여자의 의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특별히 생식을 주도하는 신을 섬기는 이방 신에게 제사 하는 시간에 여자의복을 입고 남자들이 방탕한 성관계를 제사 중에 맺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남자들이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는 것은 그 당시 가나안 땅에 있었던 우상숭배 풍습과 문화를 따르지 말고 절대 그 우상 숭배의 옷을 입지 말라는 그 명령 가운데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사람들의 안전 보다는 경제의 논리가 우선합니다. 이익을 위해 못본채 하는게 당연하고, 이익을 위해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을 전쟁에 내보내는게 당연한게 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기준을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과 원리로 살아가는 것은 영적 전쟁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삶의 지혜 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전적인 하나님 은혜로 신분이 바뀌는 게 구원이다."
신 21,10-23 | 07-28-2020
오늘 말씀은 가정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예외적인 여러 상황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면서 개개인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다사다난한 문제들이 결국 공동체의 문제가 되는 것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가정을 바로 세우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첫번째 가정 문제는 포로와 결혼하는 문제입니다. 포로 중에 여자를 아내로 삼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전쟁 노예는 주인에게 재산에 지나지 않는데 그 여자 포로에게 마음을 주고 아내를 삼고자 하면 그냥 주인 맘대로 그냥 아내를 삼으면 되는 겁니다. 그게 문화적으로 보면 당연한 건데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것을 포로라 할지라도 그 포로를 아내를 삼을 때는 이런 구체적인 절차를 따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단지 전쟁 노예에 지나지 않은 여자를 아내로 맞을 때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알려 주시는 이유는 결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는 주님의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포로와 결혼하는 절차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자신들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망각하지 말고 현재형으로 깨닫게 하시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왜냐하면 포로가 주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결국 그 포로의 신분이 주인으로 인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는 종의 신분이었고 노예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므로 주인과 동등한 신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죠. 그 상징으로 결혼하기 위해 머리를 밀고 손톱을 다 깎는 것이고, 그 자신의 신분이 바뀌어 지는 것이죠. 이제 더러운 것을 다 벗어 버리고 깨끗한 자가 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손톱을 다 깎는 것입니다. 입던 옷을 벗는 자는 것은 노예의 신분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로운 신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고 그 여자의 남편이 되고 여자는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혼 포로와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계속 현재화 시키지 원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바로 이런 이집트에서 포로 된 자였고, 노예로 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포로된 신분에서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셨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지금 포로인 여인이 결혼해서 새로운 신분이 되는 것과 똑같은 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그 신분이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혼하는 문제는 단순히 남녀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임에 구원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회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만큼 성도들의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결혼을 통해 내가 하나님께 어떤 은혜를 입었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어떻게 내 신분이 바뀌어 있는가를 늘 묵상하는 구원론적인 관점을 늘 마음에 품고 결혼 생활하는 것이 성도의 차별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두번째 등장하는 가족 문제는 장자의 서열에 대한 문제입니다. 15절부터 계속되는 말씀인데 가정에 그냥 부인이 한명이면 좋은데 두명의 아내가 있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고 여기서 가정이 복잡해지는 거죠. 한 여자는 사랑하고 한 여자는 미워하는 겁니다. 두 여자를 동등하게 사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두 여인이 모두아들을 낳았을 때 남편이 좋아하는 여인에게서 난 아들이 장자가 되는 서열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미움 받는 아내에게서 아들이 먼저 태어났으면 그 순서대로 그를 장자로 인정하라는 것이죠. 이에 무슨 의미인가 하면 남편이 이렇게 가정을 복잡하게 문제를 만들고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한 여자는 사랑하고 또 다른 여자는 미워하는….이렇게 남자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자기 감정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장자로 태어나는가는 그 사람, 남편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내 자식이 내꺼라고 생각하는 게 잘못된 것이 자식이 나에게 주어진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내가 그 부인을 어떻게 생각 하느냐는 자기 감정이고 그 아이가 우리를 통해 태어나게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 소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누가 먼저 태어나는 이 장자의 순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그 미워하는 여인이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그 장자로 그 사람을 인정하라는 것, 즉 인간의 감정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순서로 주신 것을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숙명적으로 결정해서 주신 여러가지에 하나님 소관이심을 믿으며 그 창조 질서에 내가 고개숙이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감정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순서를 바꾸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의 질서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  그냥 자식 낳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 잘 자라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가정의 책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의 질서가 하나님의 질서이며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물을 맡기셨고  그 선물에는 무거운 책임이 있다 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벽묵상 "죄의 연대 책임, 그게 진정한 공동체이다."
신 21,1-9 | 07-25-2020
벌써 25년이 넘어가는 예전 군대에 있을때 어디에나 고문관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구호를 붙이지 말아야 하는데 꼭 붙이는 사람, 그래서 수십명, 혹은 수백명이 벌을 같이 받는 일들이 군대에서 많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실수하고 잘못한 사람은 한 사람인데, 군인 모두가 같이 벌을 받는 일을 통해 군대의 연대성, 공동체성을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십계명 중에 하나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 계명의 적용이 있어 오늘 말씀은 굉장히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진 거죠. 사람이 들에서 죽어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신이 누가 죽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떻게 영적으로 해결하는가에 대해서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왜 성경이 이런 특별한 상황까지 구체적으로 계명으로 주셨을까….생각해보면 그 당시 이렇게 객사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CCTV도 없는 그때 멀리 들에서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없게 죽임을 당하는, 소위 말하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들이 제법 많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과 그 가족의 마음에 원한이 남지 않도록 공동체가 어떻게 배려해야 되는가에 대한 말씀과 함께 동시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과 그 가족의 원한을 어떻게 풀어주는가를 알려주십니다. 그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원한과 응어리가 그 가족을 무너뜨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먼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죽인 사람이 누군지 모른 채 죽은 사람이 발견 이런 절차를 밟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현장 검증에 책임을 지고 피살된 곳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도시에 있는 장로들에게 그 문제를 책임지라고 위임을 하게합니다. 두번째로는 아직 길에서 본 적도 없고 멍에를 맨 적도 없는 암송아지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짐승을 살인마를 대신해서 죽이는 겁니다. 누군가 살인을 했다면 그 살인 제는 일차적으로 살인자의 게 있는데 살인자를 모르기 때문에 그 살인자에 대한 모든 책임을 바로 이 송아지의 목을 꺽는 것을 통해 대신 죽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 공동체를 대표하는 장로들에게 지워진 죄책감이 그 짐승에게 옮겨지는 것이죠. 그 송아지의 목을 꺾는 것을 통해 살인자를 대신에 그 송아지가 죽음으로 그 나머지 유가족들의 원한과 풀리지 않은 응어리들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또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 억울하게 풀어진 피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성결 법으로 그 피를 흘리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땅에 그렇게 억울하게 사람이 죽고 누가 죽었는지 몰라 해결이 안되면 그 자체가 부정해지는 거죠. 그 부정을 갖다가 방지하기 위해 이렇게 송아지의 목을 꺾고 피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될 사람을 대신해 공동체 전체가 그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그 죄에 대한 공동체성, 연대를 가지고 송아지의 목을 꺾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영적 공동체 원리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고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있을 때, 그 아픔과 부정함을 공동체 전체가 책임을 진다 라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이 연대성이 많이 없습니다. 저희가 속해있는 연합감리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가 connectionalism인데, 그게 바로 이 연대성 을 가진 공동체성입니다. 그래서 개체 교회도 중요하긴 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연대 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는게 교회의 본래 모습이라고 믿으며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개인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우리 교회가 개인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공동체 전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의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우리 공동체 모두가 그 책임을 지고 우리 공동체 모두가 그 죄에 대해서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의 공동체성입니다. 가나안 땅의 전쟁중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그 패배한 이유는 한 가정의 숨겨진 죄 때문이었죠. 그 죄를 진 가족 전체를 돌로 쳐서 죽이므로 그 사람의 부정이 공동체 더 이상 확산되고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한 가족의 죄가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죄였고 그 죄로 말미암아 아이성 전투에서 질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거룩함 가운데 있는 영적인 공동체라면 그 교회 우선적인 가치는 항상 공동체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보호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죄인인가를 잡아내는 게 중요합니다만 그게 일차적인 해결이 아니라는 것이죠. 영적인 공동체 는 그렇게 상처받고 멍들고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은 그 가정의 마음에 있는 어 머리와 그 피눈물을 그 송아지를 통해 함께 해결하며 아파하는 것 동시에 공동체가 그런 부족한 것에 흐려지지 않도록 공동체를 보호하면서 그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통해 공동체의 성결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죄는 인간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문제가 있을 때 나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늘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손가락질 하고 이 교회는 문제 있다고 비난하고 원망하는 자리에서 서 있다면, 나는 그 교회 공동체성이나 연대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기 의만 세우는 바리새인의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누가 일으켰던 상관없이 공동의 책임으로 내 문제같이 끌어안을 때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연대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소독된 거룩한 성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거룩함과 성결함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매달릴 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붙들고 살아가는 영적인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만 많은 이 눈물 많은 세상에 해결되지 못한 응어리를 안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 아픔과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원한과 응어리진 큰 문제가 있을 때 그 송아지를 잡아 목을 꺾고 그 가족을 위로하고 모든 공동체가 연대성을 가지고 그것을 함께 책임지는 영성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내 문제와 같이 끌어안으며 함께 그것을 공동체 문제로 끌어 안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마음이 있길 원합니다. 우리 좋은 씨앗교회 신앙 공동체가 주님 앞에 거룩함을 유지하며 구별됨을 유지하며 이 세상에 다름을 선포하는 공동체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겁내고, 두려워하고, 떨고, 놀라는 인생을 넘어서라."
신 20,1-20 | 07-24-202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할 때 가져야 되는 기적을 부르는 마음가짐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 그들의 노예 근성을 정화시키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배운 것이죠. 그래서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 직전 그들은 우상숭배와 타락의 문화로 가득하여 있는 그 땅,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강한 그 땅에 들어가서 전쟁을 어떻게 하는가를 하나님께서 세 가지 원리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 원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영적 전쟁을 직면하여 승리하는 동일한 원리 라고도 생각합니다. 첫 번째 원리는 내 인생의 영적 전쟁, 그 승패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어떤 환경에 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의 기적을 갖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싸우는 전쟁의 승패는 내 손에 있는게 아니라 내 무기에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내 힘과 주변 환경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철저히 믿는 것입니다. 인생의 기적 중의 기적은 내 적군의 힘이 아무리 쎄고 강하다 할지라도 내 환경에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주저 앉지 않고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경험하는 기적입니다. 상황과 환경에 열세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적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이 영적 전쟁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면합니다. “마음에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아주 구체적으로 네 동사를 사용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 송태근 목사님은 이 네 동사를 하나의 큰 그림으로 해석했는데 그 해석을 인용해봅니다. 겁낸다는 것은 뭐냐 하면 마음이 완전히 놓고 약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겁내는 상태가 지속되는 겁니다. 떤다…는 것은 그 두려움이 계속 지속되면 내가 신체적으로 반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떠는 것을 좀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벌벌 떠는 거죠. 두려워서 몸이 반응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놀라는 거죠. 놀라 자빠진다 고 보통 우리가 얘기하는데 공포에 빠져 주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진짜 믿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겁내지 않을 수 있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고 떨지 않을 수 있고 놀라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며 겁낼 게 너무 많습니다. 두려운 게 너무 많습니다. 몸이 반응하며 벌벌 떱니다. 그리고 공포에 주제 앉아 놀라 자 빠집니다. 그게 우리의 삶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싸우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고 승패가 그분 손에 있기에 환경과 상황을 보고 겁내거나 두려워하거나 떨거나 놀라지 말고 하나님 믿음 붙들고 담대하라는 것이죠. 그래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이 싸우는 것 같고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이라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며 두려워하지 않는 그 기적을 체험하는 비결입니다.
두번째 우리가 전쟁의 영적 전쟁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영적 전쟁에 전념하지 못하거나, 올인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열외시키라는 겁니다. 5절부터 8절까지 보면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예들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라는 겁니다. 이게 다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적 전쟁의 전념할 수 없는 사람들이죠. 마음이 나눠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외 시키라는 겁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말라는 거죠. 이런 사람들 모두 열외시키는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영적 전쟁은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올린 할 수 있는 소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전쟁은 숫자 가지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자, 마음이 나눠지는 자,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이런 자들은 전쟁에 오히려 방해가 되고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몇 명이 가정 간의 올인 하며 집중하며 인생을 거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때 거기에서 역사가 있고 승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서 죄악과 싸우고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는 전투적인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와 싸우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그 성도들은 세상의 흐름에 그냥 떠내려가는 생명력이 없는 존재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죄와 싸우고 가치관과 싸우는 이 전쟁을 통해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벌벌 떨지 않고 놀라지 않는 그 기적의 삶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럴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존재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겁내거나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고 놀라지 않는 것은 기적입니다.그 기적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고 모든 전쟁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분명히 믿는데 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도피성이 아니라 긍휼로 받아주는 성이다."
신 19,1-21 | 07-23-20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여러 금지 계명에는 계명의 정신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궁극적인 정신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살리는 게 목적입니다. 오늘 말씀의 이 도피 성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계명의 정신과 함께 그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을 방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동시에 보게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의 분명한 명령 중의 하나입니다. 결국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게 법입니다. 그래서 법대로 하면 모든 살인자는 죽여야 하는 게 마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하나의 법으로 커버 되지 않는 많은 예외들이 있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살인자는 다 죽여야 하는 그 큰 법 위에 부지불식간에 살인하거나 과실치사로 살인한 자들은 빠져나갈 수 있는 예외 들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이지요.
도피 성 제도는 의도성이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들을 죽지 않도록 살려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었습니다.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는 자들의 예가 4-5절에 등장하는데 벌초를 하러 가고 나무를 베러 갔는데 그 나무를 배려 가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서 이웃을 죽이는 상황 같은 것이지요. 이런 의도성이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이는 과실치사 가 있을 수 있고, 이런 사람들은 도피 성으로 가서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신 것이죠. 의도성이 없이 실수로 죽인 자들은 적어도 빠져나갈 수 있게 도피성으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것이죠. 그러면 그들은 언제까지 있어야 되냐 하면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곳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 성에 있어야 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도 도피성에서 나오면 죽어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도피 성이라는 것을 그림자와 같이 보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죽어야만 도피성에 있는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가 누려 지는 원리를 통해 대속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대제사장 큰 대제사장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것이 수용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도피성 우리의 피난처가 되는 것이죠.
도피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죽지 않게 도망가는 곳, 피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도피성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 도망자들을 이유없이 받아주는 성입니다. 도피성이 아니라 긍휼로 받아주는 성이라 할 수 있죠. 죽을 수밖에 없는 살인자들을 은혜와 긍휼로 받아주는 성이 도피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긍휼과 은혜로
받아주시는 성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도피성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예수님에게만 달려오면 산다며 우리를 부르시고, 죄와 죽음을 피해 달려오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 주신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멸망으로 달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시는 겁니다. 살려 주시기 위해 그들을 맞아 주시고 그들을 받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대제사장으로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며 이들을 품어 주신 것이죠. 그게 바로 그분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줘야 우리는 도피성에서 나갈 수 있고 자유인이 되고 어디 가든지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도피성 되시며 우리가 주님이 나의 바위시며, 주 나에게 피할 바위되셨음을 고백하는 것이 이 그냥 피상적인 고백이 아니라 이런 깊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도피 성 되셨던 것 같이, 우리 성도들과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받아들여 주고 품어주는 도피 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피난처, 나의 도피성 되심을 고백으로 붙들고 이 세상에 도피성이 되어 세상을 환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선은 받아 질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선은 그들을 품어줄 수 있는 곳이 돼야 합니다. 가정이 받아주지 못하고, 세상이 받아주지 못하는 자를 교회에서 받아주는 것… 이건 기적입니다. 이건 우리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죠. 이 사명을 우리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조건없이 용납하시고 품어 주시고 받아 주신 성이 되셨음을 발견하십시오. 그 도피성의 은혜로 제사장이 죽음을 통해 그 보혈의 능력으로 내가 자유함을 얻었음을 발견하십시오. 그렇게 나는 이 세상에 도피 성과 같이 받아주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름 받았으며 이 세상에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벽묵상 "말씀을 받아 있는 그대로 전하는게 예언(預言)이다."
신 18,15-22 | 07-22-202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혼란스러운 영적인 문제가 발생할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와 함께 거짓 선지자와 거짓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하고 넘어뜨린다는 것이죠. 그런 혼란스러운 삶에서 무엇이 진짜 이며 무엇이 가짜인지를 분별하고 분명한 말씀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언제나 넘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언 혹은 예언자, 예언 기도 같은 것을 성경에 뿌리를 두지 않고 우리 문화가 적용하고 이해하는 예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개인적인 인생의 미래사를 말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미래에 나에게 어떤 일이 있는지 먼저 꼭 찝어 알려주는 사람을 예언자가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접신, 무당, 박수들이 밥벌이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혹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마음이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에 개인의 미래라는 것을 이야기하면 덜컥 올가미에 걸리기 쉬운 사람들이죠. 네 인생이 어떻게 되나 그런 일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딱 들러 붙는 게 바로 이런 접신, 무당, 박수들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증히 여기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선지자, 예언자는 미리 예, 예측할 예(豫) / 라는 한자를 사용하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말하는 미리 예가 아니라 맡을 예, 맡길 예(預)입니다. 그게 예언입니다. 이 예자는 뭐 예금(預金),혹은 예치금.. 그건 뭐냐면 은행에 돈을 맡기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의 예언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맡김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경에 말하는 예언(預言)은 물론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豫言)이 포함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 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언(預言)자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있는 모습 그대로 전하는 겁니다. 그게 예언이고 예언의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말씀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바로 대해 예언자의 삶이고 선지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에 그 예언자로의 사명은 개인적인 사람들의 미래를 점치는게 아니라 사람들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말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본질적인게 아니라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본질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깊이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채워줘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목회자가 늘 조심해야 되는 것 건 뭐냐면 사람 상대하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는 겁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들을 상대하기 그네 하나님을 먼저 상대하고 하나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고를 백성들에게 하셨지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오….백성들을 향한 경고 입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게 될 때 그 말씀을 받아 들었을 때 그 말을 듣지 않고 무시하는 자는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언자의 그 입술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고 그 것을 듣게 되면 그 말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기준이 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붙들고 이 세상에서 은혜로 살아가는 자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있는 겁니다. 또한 선지자들에게도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신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전하지 않고 내 생각을 전하거나 내 마음대로 전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전하면 망하고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자가 되고 예언자가 되고 변하지 않기 위해 늘 초심을 잃지 않고 한결같은 이 마음을 잊지 않는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것이 사명이 돼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좋은 목회자는 누구입니까? 가장 중요한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자입니다.목회자인 제 자신부터 성도인 여러분들 모두가 사람들을 만나 교제하고 섬기는 게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며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에게 이렇게 고백하며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주님 제가 예언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전하는 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도와주옵소서. 세례 요한과 같이 주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전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외치는 소리만 되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으로 다 약속을 주셨고 이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는 것이 기쁨이 되고 이 말씀을 가감없이 듣는 것이 기쁨 되는 우리 교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가감없이 전하는 것이 소명인 곳,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끝까지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이 모인 곳, 거기에 우리 영적 권위가 있고 영적인 깊은 묵직함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듣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교회 본질이 회복되고 목회자의 권위가 있고 교회가 생명 공동체가 되는 신비와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새벽묵상 “처음처럼….의 마음을 가지고 살라”
신 18,1-14 | 07-21-2020
오늘 말씀은 레위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처음처럼” 이라는 이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레위인과 제사장을 세우는 것을 통하여 “처음 처럼”의 마음을 가지고 세워지는 영적 리더십 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죠. 제사장이나 의인들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최우선으로, 처음처럼 섬기도록 특별하게 부름 받은 자를 자들입니다. 처음처럼, 최우선으로, 온전히 섬기기를 부름 받았기에 가나안 땅을 분배 받아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그 모든 삶에 있어서 일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온전히 그들의 삶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책임져 주셨죠. 그래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책임 가운데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처음”이라는 것을 여러 군데서 강조 하셨는데, 처음으로 드린 것, 하나님께 바친 것 가운데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처음 거둔 혹시 처음 각은 양털 계속해서 처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첫 열매, 첫 곡식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처음 것을 드리는 것을 통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고백의 의미가 담겨있을 뿐 아니라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이 내 삶의 넘버원 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의미가 다 들어가는 것이죠. 그런 헌물을 받아 기업으로 살아가는 레위인들은 반대로 “처음처럼”이라는 이 초심을 잊지 않고 백성들을 사랑하며 바른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의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제사가 처음을 드리며 내 모든 것을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임을 잊지 않고 거룩하게 그 소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형제들 가운데 세우라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은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섬기는 특별한 부르심의 있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특별한 계층이나 특별한 클래스가 아니라 다른 지파들과 마찬가지로 형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태생이 특별한게 아닌 사명이 특별할 뿐임을 선명하게 가르치시는 겁니다. 즉 레위인들이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위에서 아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형제와 형제 간의 사랑과 은혜에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죠. 반대로 레위인들을 섬기는 모든 백성들은 그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기는 겁니다. 레위인들을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겁니다. 레위인들 자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레위인들이 섬기는 사명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능력으로 내가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교회에서 섬길 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이 내 삶의 넘버 원입니다….는 것을 고백하며 섬기게 될 때 내 이름이 너무 드러나지 않도록 내 공로가 너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섬김이 되는 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드러나는 섬김이 되어야 되며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지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흔들리게 되면 “처음처럼…” 의 마음을 잊어버리게 된 것이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내 이름이 드러나기 위해 섬기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한다 그러는데 내 이름이 조금만 가려도 섭섭해서 불평하고 여기에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데…그러냐며 무언가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람들의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갈 때 내가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지 특별히 나의 섬김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나의 이름인지 하나님의 이름인지 나의 영광 인지 하나님의 영광인지를 늘 고민할 수 있어야 되며 이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구별된 자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처음처럼…”의 마음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서 사는 온전한 삶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철저히 멀리하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완전한 삶이며 온전한 삶입니다.


새벽묵상 "전쟁 앞에서도 예배가 먼저다."
신 16,9-22 | 07-17-2020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그들에게 어떻게 예배를 잘 드리고 제사를 잘 드릴까를 가르켜 주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지금 전쟁을 앞두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러면 모세 입을 통하여 어떻게 전쟁을 잘 할 것인가, 어떻게 전략적으로 적들을 이길 것인가…이런 것을 회의하고 연구하는 게 당연해 보이는 데 그런 것을 우선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적군을 분석하고 지형지물을 연구하는 것을 먼저 하라 명령하지 지 않았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 제일 먼저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 드리고 하나님께 제사드리는가…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계속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실용적이지 않고 너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동떨어진게 아닌가, 생각할지 모르나, 이런 동일한 가르침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전쟁터와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더 잘 살까를 가지고 고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기억할까..하나님의 은혜 앞에 내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이런 것이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우선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전쟁터와 같은 이 세상에서의 승리는 결국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나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며 동행 하심을 믿는데 있고, 그분을 믿음의 대상으로 존재 중심의 믿고 고백하는 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예배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우리 삶의 전부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림 안에서 우리는 계속 이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어제는 유월절에 대한 강조 말씀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칠칠절과 초막절에 대해서 우리가 배우려고 합니다. 이 세 절기,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은 유대인들이 꼭 지켜야하는 절기이고, 이 여호와의 절기들은 구속과 구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기억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칠칠절은 7일을 7번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이후 오십일, 첫 열매를 봉헌하는 절기로 수확할 수 있는 곡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칠칠절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억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해 그들의 존재가 형성되고 그들의 자의식을 하나님의 약속에 되는 귀한 절기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순절로 더 익숙하게 알려져 부활의 첫 열매인 그 열매가 50일이 지나 복음의 증인으로 영적으로 추수와 수확하게 되는 것을 감사하는 것, 그게 오순절 성령 강림입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보혜사로 오신 성령님이 오셔서 교회가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오순절, 즉 추수 때에 수확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을 복음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약의 기초해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우리가 탄생하고 부름 받았음을 깨닫는 절기가 바로 칠칠절, 오순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두번째로 초막절이 등장합니다. 초막절은 수장절 이라고도 부르고,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에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그 광야 생활 동안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가을에 토지의 수산을 수확할 수 있게 복 주신 하나님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죠. 특별히 이 초막적은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가 갈리는 심판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끗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이 초막절의 영적 의미입니다. 또한 이 초막이라는 것은 장막을 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dwell이라 하는데,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마음 한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으며 그분의 은혜를 깨닫는 게 바로 초막절, 장막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초막절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예수님이 내 마음에 장막을 치며 마음 한 가운데 나와 계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절기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하나의 큰 프로그램 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프로그램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에게 임하는가를 잊지 않고 일 년 내내 삶 속에 녹아 지게 만드는 프로그램인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 땅 들어가기 직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얘기들을 먼저 듣고 싶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들어야 될 것은 예배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추수 라는 것을 최근에 거의 해보지 않은 백성입니다. 40년동안 광야에서 방황한 백성들입니다. 그들에게 칠칠절, 초막절 피부에 와닿지도 않을 것 같아요. 전쟁을 앞둔 그들에게,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나중에 추수 하며 이런 절기를 지키고 이런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영적 의미를 깨닫기 원합니다. 전쟁터와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의 승리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가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를 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가를 늘 기억하십시오. 그 은혜를 현재화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새벽묵상 "움켜쥐는 인생이 아닌 손을 펴는 인생이 되라."
신 15,12-23 | 07-15-202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종들을 대우하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 당시에는 많은 종과 노예들이 있었는데 특별히 오늘 말씀은 동족인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노예로 종으로 팔려 온 사람들을 집중합니다. 이것은 대부분 어떤 때를 전제 하냐면 그들이 돈을 빌렸는데 돈을 갖지 못하는 겁니다. 아는 사람들끼리 빛을 지었다가 빚을 못 갚게 되면 이렇게 몸으로 때워 종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빛을 갚지 못하고 종으로 6년을 살게 되면 주인이 7년째는 탕감해서 풀어주라는 명령입니다. 그렇게 종으로 6년 동안 살다가 7년째 될 때에 그들을 탕감해 주고 자유케 해 주는데 어떻게 풀어 주는가 하면 그냥 빈손으로 내보내지 말고 먹을 것을 후하게 주라 명령하십니다. 자유만 주는게 아니라 나가서 다시 빚지지 않도록 넉넉하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것이죠. 그렇게 풀어 주고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복을 기억하며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속량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이런 실천을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옛날에 저렇게 종 되었고 저렇게 결박되었고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속량, 자유함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운 동족을 잘 돌 보라는 표면적인 이유를 넘어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바로 용서와 사랑에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이 삶의 기초가 되고 삶의 중심이 되는 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용서와 사랑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 탕감 이라는 말로 오늘 말씀에는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보게 되면 죄의 용서를 빚을 탕감해 주는 것과 연결해서 가르치시는 비유가 굉장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임금님이 탕감해 주는 거죠. 그래서 이 탕감이라는 정신을 통하여 빚으로 종이 되고 노예가 된 사람들을 6년 동안은 일하고 7년째는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탕감의 정신을 통하여 바로 하나님의 나라 정신을 그림자와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빚으로 종 됨, 노예 됨을 탕감해 주고 자유케 하는 이 명령을 통하여 우리가 죄의 종 노릇하는 이 삶을 탕감해 주시고자 약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는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귀 뚫은 종의 대해서도 증언합니다. 그렇게 7년 째에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더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풀어주려고 그랬는데 주인이 너무 잘해주니까 나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주인을 섬기며 그 곳에 있을 수 있었는데 그들을 귀뚫은 종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귀를 뚫어 따는 것은 내가 주인과 계속 살기를 원한다는 자원하는 약속이고요. 또한 주인에게는 이렇게 자원해서 머무는 종들을 가족과 같이 내가 보살피며 함께하겠다는 그 약속이 모두 귀를 뚫는 것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귀 뚫은 종과 같이 나에게 구원 받은 그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섬기는 종이 되는 귀 뚫는 종의 삶을 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안에 머무는 이 영적인 의미를 우리는 이 귀 뚫은 종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내가 복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선 이렇게 풀어 주시는 은혜를 나에게 주셨다는 것을 믿으며 이 세상에서 과거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고 품고 살아가는 그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에서 인생에는 두 종류의 인생이 있음을 증언합니다. 움켜쥐는 인생과 손을 펴는 인생…. 여기서 움켜지는 인생이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돈 못 갚은 사람을 멱살을 잡는 자입니다. 내걸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불이익을 준 사람을 가만 두지 않고 멱살을 잡는 삶이 움켜지는 인생입니다. 늘 움켜쥐며 살아가고 늘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게 이 세상에 삶입니다. 그런데 손을 펴는 인생이란 나보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봤을 때 그렇게 그들을 하대하거나 멱살을 잡지 않는 입니다. 반대로 그들을 먼저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넉넉한 은혜가 있는 삶,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내가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과의 관계를 기억하며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을 그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며 남과 같이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줄 때 거기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난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을 움켜지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손을 펴며 살아갑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멱살 잡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움켜 쥘 일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멈추고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품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내가 멱살잡고 움켜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펴 그들에게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가는 삶 그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 다름을 선포 하면 성도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내가 누구인 지를 확인하는 정체성이며 이것을 붙들고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 다움을 회복하는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하루가 주님이 주시는 그 천국을 맛보는 귀한 은혜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빚 져보면 돈 무서운지 금방 안다."
신 15,1-11 | 07-14-2020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돈이 무서운 것을 아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빚을 져보면 돈 무서운지를 금방 압니다. 사람들 사이에 돈을 빌리는 문제는 지금 이 시대에도 굉장히 큰 문제이고요 수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갈 때도 굉장히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5장은 사람들 사이이 일어나는 이 돈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돈을 빌리고 빌리는 것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계속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 말씀 “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겠으므로…” 라는 말씀이 정말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가난한 자들은 언제든지 그치지 않고 넘쳐 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빚 잘못 졌을때, 인생을 노예로 만들며 구렁으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빚쟁이들에게 빚독촉을 받아보면 이건 거의 지옥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이토록 빚지는게 무서운 일이며, 빚을 져 보면 우리를 깊은 늪에 빠지게 하는 것, 노예로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빚지는 것을 가볍게 여기면 나중에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빚지는 게 위험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삶이 절박하다 보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빛을 지게 됩니다. 잘못된 고리대금업자에게 말도 안되는 이자로 빚을 냅니다. 그렇게 힘들고 약한 사람의 어려움을 이용해 득을 보는 고리대금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고리대금업자가 있고 그것이 사회 문제가 되긴 하지만 예전에는 아예 그런 것을 규제하는 법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돈을 빌리고 높은 이자에 돈을 갚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고요. 그 일로 횡포를 당하는 자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빚을 못 갚게 되면 몸으로 때우기 위해 노예가 되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 그 당시의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빛을 면제해주는 해를 선포하신 겁니다. 일정한 때가 되면 빛을 조건없이 탕감해 주는 거죠. 독촉하지만 알고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빚 독촉하지 말라”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와 정반대 일이죠. 돈을 빌리고 안 갚았으면 당연히 독촉해야 하고 갚을 때까지 감옥에 쳐 넣는게 당연한 일인데, 독촉하지 말라….그리고 몇 년 지나면 면제해주라….이것은 거의 이 세상과는 맞지 않는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사람들과 삶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살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 살아 갈 때 다름과 구별된 이 바로 이런 빚 문제와 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내일 더 구체적으로 배우겠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여호와를 위해 빚 독촉 하지 말고, 면제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빚 독촉 안하고 면제해주는 본질의 이유는 여호와를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통하여 내가 어떤 존재이며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은혜를 받은 자임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구원해줬던 그 은혜를 돈으로 치면 환산할 수 없는 수 많은 액수의 돈임을, 어떤 누구도 갚을 수 없는 그 놀라운 돈을 하나님이 탕감해 준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빈손으로 노예 상태에서 나왔음을 기억하면 너희는 모두 백만 달란트 빚 진자들이었고…그것을 다 은혜로 탕감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내가 너희를 다 먹이고 입히고 지금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에 너희를 들여보낸다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은 이유로 설명할 수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가 바로 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실천하고 드러내는 것이 바로 뭐냐 하면 빚 진자들을 학대하지 않고 긍휼한 마음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관계가 이익과 불이익의 득실 관계로만 따지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개입하심을 체득하기 어려우며,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 세상에 믿음의 자녀들을 보내셔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그 백성의 다름을 선포하며 세상에 빛을 비추어 라는 것입니다. 그 세상의 빛을 비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사람을 돈을 가지고 착취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겁니다.사람을 돈으로만 가치를 매기지 않는 겁니다. 사람을 노동력으로 만 보지 않는 겁니다. 사람을 필요한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 겁니다. 일차적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대상으로 보며 인격으로 바라오며 그들을 하나님의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관계성을 정리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죠. 그런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 다름과 거룩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다움, 하나님의 자녀다움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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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며 살아가라."
신 14,12-29 | 07-11-202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비결에 대해서 알려주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섬기고 가나안 문화에서 물들지 말고 우상을 무너뜨릴 것을 명령하셨고 오늘 말씀의 세 가지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첫 번째 비결은 바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근본 정신이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을 때 십일조가 우에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구체적인 감사 표현이며 내 삶에 하나님이 넘버원이라는 우선순위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담긴 것입니다. 나의 인생에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복이며 나의 인생의 모든 승리와 성공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고백하며 마음에 담아 드리는 그 십일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내 삶에 모시며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일조에서는 산술적으로10분의 1을 계산해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처음 것을 떼는 게 중요합니다. 처음 10분의 일을 드리는 것을 통해 그 희생과 구별을 통해 내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예배의 대상으로 바라 본다는 것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 소속이며 이 십일조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이라는 정신이 있을 때 하나님과 가까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마음 없이 형식에 치우쳐 있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 시듯이 마음 없이 돈만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본적인 내용이 본질에 의해 형식이 담겨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은혜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때 성경은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 되셨다” 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부활의 첫 열매 라는 것은 처음 것이라는 것도 있지만 모든 것이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첫 것을 내어 주신 겁니다. 그 첫 것이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시지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첫 것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 하시는지를 십자가 사랑에서 선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전부를 받은 자라는 것을 실제로 믿고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놀랍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첫 것을 내어 주신 사건이며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신 놀라운 신비 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과 내어 주심에 대한 우리 믿음의 반응과 고백이 십일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그 첫 것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비결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 우리 성도들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성도 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고 마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로 인해서 얼마나 더 저희가 함께 모여 대면 예배를 못 드리고 식사를 예배당에서 못하고 있기에 이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피부로 깨닫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예배 드리고 식사 교제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으로서 우리는 함께 먹는 것은 굉장히 잘하는데, 뭐가 약하니 하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약합니다. 우리는 그냥 먹고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그냥 함께 밥 먹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교제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함께 식사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함께 먹어야 되며 하나님 앞에 함께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기쁨을 함께 진심으로 즐거워해 줄 때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남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울어줄 때 기댈 언덕이 되어주면서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그 은혜를 같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라는 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 인생의 함께 먹고 함께 제거할 사람들을 교회 공동체에서 만나며 하나님 안에서 함께 성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함께 즐거워할 사람들이 있습니까?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전심으로 즐거워해 줄 친구가 있으십니까? 아니 여러분들은 남이 좋은 일 잘 된 일을 이야기할 때 샘 내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서 깎아 내리지 않고 정말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기쁨에 동참하실 수 있습니까? 그게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비결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될 때입니다. 바로 그 시대의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을 품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레위인과, 객과 고가와 과부를 품는 것입니다. 그냥 잘 아는 몇명과, inner circle 사람들과 잘 먹고 기뻐하는 게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함께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맞는 몇 사람과 친한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수십 년 동안 같이 진행 사람과 그냥 잘 지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두루두루 사랑하며 모두를 품고 가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개념이 몇몇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품을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을 가까이에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고백인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놓고 기도하는 정신과 닿아 있습니다. 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아는 몇 사람을 그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용할 양식을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은 자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며 하나님의 가까이에 만나시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하나님 앞에 우리 백성들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폼 이어 그들을 섬기며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비결을 얻기 원합니다. 이 삶을 통하여 나의 일상이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가까이에 만나시며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이 하루를 주님의 은혜 가운데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몸도 마음도 피흘리게 방치하지 말라."
신 24,1-21 | 07-10-2020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종교와 문화에 물들지 않으며 살아가는가를 알려주고 계신 말씀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나 물들지 말아야 할 첫번째는 유행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가나안 땅의 유행은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을 애도하는 것을 넘어 애도할 때 자기를 자해하는 겁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라 (1)”는 것이 바로 자해하면서 그 사람을 애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해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유행 했었어요. 엘리아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 선지들과 싸울 때 그들이 하늘에서 불이 안 떨어지니까 나중에는 자해하며 간구하는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 이마를 과도하게 미는 것 또한 과도하게 표현하는 감정인 것입니다. 그런 자해하는 문화는 오랫동안 이방 종교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감정을 극도로 표현하며 하나님이 주신 몸을 자해하며 과도하게 표현하는 것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닮아 가다가 흉내 내다가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것은 따라가지도 말고 흉내도 되지 말라는 거죠.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떠났을 때 애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해하지 않고 그래도 몸에 어떤 해를 하지 않고 애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본향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믿음 가운데 슬프지만 감사할 수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사람이 죽은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 죽음의 현장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이방의 이런 잘못된 문화에 물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몸을 하찮게 여기며 막 다루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 귀한 지 모르고 자기 몸을 막 대하고 학대하는 문화,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극도로 표현하는데 몸을 상하게 하는 문화 또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몸은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임을 잊지 말고, 내가 내 몸을 잘 관리하고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나 물들지 말아야 할 두번째는 아무거나 먹는 것입니다. 먹는 데서 이방 사람들과 차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먹느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하게 지낸다는 것은 결국 내가 입으로 무엇을 먹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먹느냐가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과 건강하지 않은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사람들은 내 입으로 먹을 것, 못 먹을 것 구별 없이 아무거나 먹는다는 것이죠. 내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던 말던 아무거나 내가 좋고, 내가 원하면 그냥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먹느냐를 가지고 구별하며 신중하게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별된 삶이라는 것은 알려 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먹느냐가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비결이기도 하고요. 영적으로도 건강하게 만드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여러가지 정한 것과 정하지 않은 것들이 나오게 되는데 먹어도 되는 여러 동물들은 대부분 초식동물 드립니다. 물고기 중에도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부정하지 않은 음식이니 먹어도 되고 그렇지 않은 음식들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에 대하여도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먹지 말아야 할 새들의 대부분은 육식을 하는 새나 혹은 썩은 고기를 먹는 새들이라고 합니다. 결국 새들 중에 육식을 하며 시체와 피를 먹는 그런 새들은 부정하기 때문에 그런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는 그 새들을 우리가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제가 묵상하면서 마음에 깊이 머물렀던 것은 18절 말씀에 등장하는 “박쥐를 먹지 말라”를 명령입니다. 요즘 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지금 신음하고 멈춰 서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 박쥐로부터 변종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지 않습니까?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없이 먹고 함부로 먹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경고하는 말씀과 같이 다가와 깊이 묵상해보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먹지 않아야 되고 먹으면 건강하지 몸을 망치는 것들까지 함부로 먹는 가운데 우리 몸에 모든 통전성이 깨지면서 나타난 것이 이런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것을 깊이 묵상해보면서, 우리가 먹는 것을 정말 조심해야 하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남용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깊이 반성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입으로 무슨 음식을 먹는 것을 조심해야 하듯, 영적으로도 내 마음으로 무엇을 먹고 마시는가를 조심하는 것이 영성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이 신명기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재해석 한다면 결국 내가 인생에 있어서 내 마음에 계속 무엇을 먹고 있는가를 분별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내 마음에 계속 심기워지는 부정적인 수많은 나쁜 감정들 스트레스로 찾아오는 수많은 나쁜 것들을 계속 먹고 마시며 내 마음의 쌓이면 결국 것이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거죠. 마음에 피를 흘리게 만드는 자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 입 밖으로 더러운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며 마음속에 담지 말아야 될 것, 내 마음에 심지 말아야 될 것,내 마음에 품지 말아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이 시간 내 마음을 주님이 먹으라고 하신 것만 마음에 심고 취하며, 주님이 허락하신 것만 내 마음에 품으며 살때, 몸도 건강하고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 영혼의 건강을 위해 정함을 위해 늘 주님이 허락하신 신선한 사랑과 은혜와 그 말씀만을 마음에 심는 구별되고 거룩한 삶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신 13,1-18 | 07-09-202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이라는 축복을 주시며 여호와의 이름을 두기 위해 우리에게 거룩과 성결을 명령하셨고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만을 예배 대상으로 바라보며 살라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 안에 머무는 것이 진정으로 복되다….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광경을 누리는 안식이 되는 것이죠. 신 13장 말씀은 그 안식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 그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구체적인 예가 세 가지 등장합니다. 첫번째 안식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복을 도망가게 만드는 것은 이적과 기사의 미혹 당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무너졌던 백성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 삐딱한 눈, 구별할 수 없는 눈, 이 세상 밖에 보지 못하는 눈은 항상 올무와 미혹에 취약합니다. 내 눈은 혹한 곳을 따라 가기에 그냥 빠지고 눈에 보이는 기적과 이사를 아무런 분별 없이 그냥 쫓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외에도 이런 현상의 종교는 아주 보편적입니다. 그런 기사와 이적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모든 종교들이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은 작두도 타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눈에 보이는 기적과 이사에 현혹되는 겁니다. 가나안 종교의 사람들 또한 이런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가지고 약속의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 미혹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그 미혹에 빠지게 되면 그것이 시험이고 넘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현상과 이사와 기적들을 보며 내 눈과 마음이 현혹된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따져야 되는 것은 분별입니다. 그 안에 진리의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따라가면 안됩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기준에 따른 열매고 결과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적과 기사가 어떤 현상으로 보여 내 마음을 흔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있으면 거절하고 피해 다녀야 합니다. 우상들을 숭배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가지고 오늘도 예전도 동일하게 성도들을 미혹하는 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런 것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안식을 잃어버리고 복에서 떠나게 하는 것은 아는 사람들을 통한 꼬임입니다. 6절 말씀에 등장하는 표현은 지금 피부에 와 닫게 전문 용어로 얘기하면 다단계 방식이죠. 아는 사람들의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다단계 방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겁니다. 얼마전에도 한국에서 다단계 를 파괴하는 곳에서 노인들이 집단으로 코로나 감염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왜 어르신들이 그런데 다단계 많이 가는가 하면 식사 잘 대접하고 즐겁게 해주고 나서 마지막에 미끼 같은 상품을 파는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공짜 점심이 전혀 없습니다. 공짜에는 다 대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짜 좋아하고 공짜라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꾀어내고 미혹하는, 가만히 나를 찾아오는 다단계를 거절할 수 있어야 되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혼탁하고 시대가 어려울수록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이런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진리 가운데서 이 수 있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힘있는 사람들의 협박입니다. 기적과 이사로 눈을 현혹시켜서 우리에게 소견에 옳은 대로 따라 가게 만들어 우리 스스로 올무에 빠지게 만드는 방법, 다단계 방식과 같이 아는 사람들 이용해 우리를 미혹하는 것, 이 두가지가 안 통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하는 방법은 힘을 동원한 협박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 성도들을 이제 힘을 동원해 협박하는 거죠. 13절의 “불량배가 일어나 유혹한다” 는 것은 유혹이 아니라 협박 입니다. 안나오면 불이익을 당하게 만드는 게 협박입니다. 힘을 이용해서 강제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우상숭배하도록 불이익을 주며 협박하는 겁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구별되게 살면 공동체에서 왕따를 당하고 불이익을 당한다는 겁니다. 가나안 땅에 살아가는 수많은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지막에는 그렇게 해서 넘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는 가나안 땅은 죄의 바이러스가 가득한 곳이며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우리를 눈에 보이는 기사와 이적으로 흔들고, 다단계 같은 관계성으로 흔들고, 협박을 통해 우리를 흔들어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드는 수많은 일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정신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도전 가운데 있으며 어떻게 이런 미혹과 올무, 꼬임과 협박에 빠지지 않고 예배를 회복하며 거록함으로 하나님만을 예배 대상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는가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은혜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타협하지 않고 물들지 않으며 거절할 것을 거절하며 빠지지 않을 것을 빠지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만을 예배하고 섬기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싸워 나가고 지켜야 할 삶의 방식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은혜를 붙들고 오늘 하루도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머무시는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
신 12,20-32 | 07-08-2020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 주시는 실질적인 복과 특별히 조심해야 될 것을 동시에 알려주고 계십니다. 가나안 땅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이며 하나님이 앞서 싸우시는 전쟁임을 잊어버리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예배하면 이런 복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20절에 등장하는 고기를 마음껏 먹는 복입니다. 지금같이 고기가 풍성하고 코 스코 가면 고기가 쌓여 있는 우리에게는 별로 이것이 큰 복으로 느껴지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한국에서 고기와 쌀밥을 마음껏 먹을 수 없었을 정도로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국에서 도시락을 싸 갈 때 쏘세지 반찬이나 고기 반찬을 도시락으로 싸우면 부잣집 아이라고 그랬습니다. 저보다 훨씬 어른 세대는 고기 반찬을 마음껏 먹는 게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일 년에 몇 번 고기 들어간 미역국 먹고 쌀밥 먹는게 꼽을 정도로 고기와 쌀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겐 이 고기를 마음껏 먹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이 없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살 때 그 고기 좀 원없이 먹었으면 좋겠다 고기 좀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그게 그들의 광야 생활 가운데 큰 불평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면 이런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겠다는 것이죠 그게 정말 복이었습니다. 고기를 마음껏 먹는 곳은 천국이나 다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복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겁니다. 너희에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게 약속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즐거이 동행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주의할게, 고기는 마음껏 먹는데 피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동산 안에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를 먹지 말라하신 경고와 같이, 고기는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피는 먹지 말라는 조건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기를 무한정으로 내가 원하는대로 네가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게 해주는데 절대 피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를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묵상해보면, 피는 생명을 상징 하니까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정신을 담고 있기에 먹지 말하 경고하셨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생명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피는 생명이고 그 생명은 하나님께 것이라는 고백이 있기 때문에 그 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구별될 마음으로 피를 먹지 말라는 그런 고백이 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그 당시에 가나안 땅의 많은 우상 숭배하는 민족들은 피를 즐겨 먹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녹용이라고 해서 동물의 피를 담아서 먹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 동물의 피에 특별한 힘과 능력이 있다 믿기에 피를 먹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 가나안땅의 사람들은 동물의 피 가운데에 능력이 있어서 그 피를 먹으면 특별한 능력과 힘이 있다 믿으며 피를 즐겨 먹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피를 먹지 말라 금지 하신 것은 우상들을 을 섬기는 자들이 그런 미신가운데 피를 먹는 문화에 동화되고 물들지 말라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피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땀과 눈물을 의미하기 때문 이기도 합니다. 세금을 말할 때도 우리는 혈세라고 하는 겁니다. 백성의 피가 들어간 돈이 바로 세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피같은 부정부패에 사용하는 탐관오리들을 가리켜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탐관오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방법으로 백성의 피와 생명을 갉아먹는 것이죠. 그렇게 잘못된 신앙 가운데로 빠지지 되는 대표는 자녀에게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자식을 불살라 바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 당시에 우상숭배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피를 함부로 흘리게 만들었던 그런 우상숭배와, 남의 피를 함부로 생각하는 생명경시 사상에 절대 물들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바로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고기를 먹되 그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땀과 눈물을 통해 먹게 되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다른 사람의 피땀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성도로서 우리는 피가 생명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생명이 나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음을 믿으며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모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피를 함부로 생각하며 그 피를 함부로 흘리게 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며 하찮게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 피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도록 늘 다른 사람의 피를 경시하지 않는 삶을 사십시오. 그런 악한 삶을 청산하고 생명은 하나님께 것임을 믿으며 늘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피를 먹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이며 우리의 삶의 고백이길 원합니다.






새벽묵상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물 주심을 잊지 말라 ."
신 12,1-19 | 07-07-202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선물하신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냥 잘 먹고 잘 지내는 그냥 자신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벗어나면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망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꼭 해야 되는 것은 우상들을 없애는 것이죠.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의 예배 방식과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을 그들이 포기하지 않기 위해 그 땅의 우상들을 없애야 되고 그 우상 숭배를 무너뜨려야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우상들은 결국 자신들을 위해 만든 형상입니다. 우상에게 무엇을 바치고 화려하고 요란하게 제사를 하지만 그렇게 우상에게 절하며 예배하는 모든 본질은 그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영광과 이익을 돌리는 것이며, 자신을 기쁘게 하는 타락한 백성들이 드리는 타락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해야 될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일은 그 땅의 모든 우상들을 쫓아내고 없애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그 풍요로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거절한 채 그 모든 우상들을 없애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물로 받은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예배를 세우며 우상들을 없애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그 소명을 위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라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머물며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복 가운데 머물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 분은 거룩한 백성으로 그곳에서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우상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고 순결한 백성이 되어야 하나님의 이름이 그 곳에 머물 수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도들이 온전한 예배자로 회복해야 되며 하나님만을 섬기며 모든 우상들을 없어야 되는 이유는 그래야만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머물며 그 복이 자자손손 그들에게 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한 거룩한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는 이 목적을 잊어버린 채 무너졌습니다. 우상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우상이 있는 현지인들과 자꾸 혼합하고 자꾸 물들어 가려 했던 과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8절에 등장하는 “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는 경고 말씀입니다. 광야1 세대가 다 엎드러지고 40년을 방황한 이유는 바로 “자기 소견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게 아니라 자기 옳은 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게 망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렇게 하지 말라 경고하는 겁니다. “각기 소견대로 했다.” 는 말은 사사기를 큰 맥과 같이 정의하는 말입니다. 사사기의 삶이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에서 불순종하고 무너졌던 그 삶의 패턴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림자의 왜곡을 실상으로 착각하는 자신의 삐딱눈,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그 눈을 믿으며 그 눈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삶을 반복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이 축복 가운데 그 전쟁을 하고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마음에 방식대로 살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명령하신 삶의 방식대로 살아 모든 우상들을 타파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복 주셨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이 원칙을 놓치지 말고 오늘도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말씀이 마음과 뜻에 머물게 하라."
신 11,18-32| 07-04-202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쉐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쉐마 로 듣는 것, 바로 듣는데 한귀로
듣고 한귀로 나가는 말이 아니라 마음에 두고 뜻의 두기 위해 듣는 것 아주 집중해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에 머물고 뜻에 머무는 것, 이것이 복이며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똑똑하고 탁월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착해서 강해서 쓰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해서 쓰시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사람 이며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드리는 자,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기 위한 방법은 18절 이하에 나오는 지속적 노출과 반복적 노출입니다.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에 기록하고 계속 가르치고….이게 다 말씀에 대한 직접 광고, 간접 광고 아니겠습니까?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상품에 대한 광고 만들어도 그 상품을 사게 되는 게 광고의 효과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고객이라도 더 잡기 위해 직접 광고 뿐만 아니라 간접광고 ppl 인 간접광고 도 많이 하는 게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직접적,, 간접적으로 지속적으로 노출을 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과 뜻에 두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들며 지속적으로 말씀에 노출되며 그 말씀이 내 마음과 뜻에 머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 어떤 것보다 복된 인생 이라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을 보면 우리 인생 앞에는 복과 저주의 선택지가 놓여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복의 길도, 저주의 길도 결국 너희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복을 선택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오는 게 저주, 순종하면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면 저주를 주시는 겁니다. 이 선택지를 지금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라 명령하시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지 못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불순종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과 저주의 길이 둘다 펼쳐져 있어요. 선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복과 저주는 내가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어느 편에 서서 어떤 순종을 하며 살아가는가, 거기에 복과 저주의 삶의 길이 우리에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복과 저주의 선택지가 우리에게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저주로 무너지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뜻의 담아 그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편에 서며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주시는 그 은혜 가운데 머무는 보게 백성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내인생의 복이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선택하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십시오. 마음과 뜻에 하나님의 말씀만 품으십시오. 복된 길을 선택하시며 주님의 복 안에 머무는 자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하나님의 손 안에 내 행복이 있다."
신 11,1-17| 07-03-2020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다시 한번 갱신하시며 하나님께서 예배자로 살기를 원하시는 요구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loving, serving, obeying, trusting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런 예배자의 삶을 살기를 요구 하셨고 두번째로 마음에 할례와 목을 곧게 하지 않는 교만을 꺾는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런 예배자의 삶과 마음에 할례를 잊지 않고 교만하지 않기 위한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11장 말씀의 핵심인 “기억하는 삶”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성은 신뢰를 근간으로 하는 약속 위에 이루어져 있습니다. 연애와 결혼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 약속 위에 서 있는가 서 있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성은 이 언약이라는 약속 위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병력을 지킨다는 것은 이 언약의 약속을 의무가 아닌 기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누구신가 를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속에 담아 기억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관념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 행하신 이 모든 큰 일들 놀라운 인들은 현재형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로, 마음의 할례를 받아 겸손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이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출애굽 사건을 다시 한번 꺼내 옵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애굽 군대가 어떻게 추격해왔고, 홍해를 어떻게 마른 땅과 같이 걸었으며 수많은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을 선명하게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생 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현재형으로 계속 기억하는 것이 회복되는 비결입니다. 특별히 성만찬의 은혜라는 것은 그 예수님께 사실, 놀라운 십자가 사랑을 우리가 망각하지 않고 현재형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이것이 성도의 삶이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가시고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까?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늘 기억하고 바라보는 삶을 사십시오.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우리는 복기할 수 있고 그것을 세어볼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의 삶이 메마르지 않고 주님의 은혜에 풍성한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 이 경 험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 살필 것은 바로 가나안 땅은 애굽 땅과 같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 는 것이죠. 너희가 들어가서 차지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게 돼 가나안 땅은 애굽 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죠.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그 곳에서 행복하기 원하는 것, 그곳에서 살아남기 원하는 그 모든 조건과 그 원천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은 나일강이 풍요를 상징하며 그 풍요로움이 결국은 하나님께 멀리 가게 하는 돈과 재물과 우상을 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풍요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애굽의 가치관이며 세상에 문화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그렇게 풍성한 물이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적 이거나 환경적인 조건을 기대면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11절 말씀과 같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머금지 못하고 흡수하는 땅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살아남는가… 하나님이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셔야만 경작할 수 있는 땅, 살아남을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12절과 같이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 이라는 것이죠. 그 땅은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어 때에 맞춰 물을 부어 주셔야만 살 수 있는 땅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과 조건의 기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열어 주셔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은, 우리의 풍요와 행복이 하나님이 돌보아 주심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나의 인생의 행복을 죄다 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이 행복을 부어 주시고 돌보아 주실 때 나는 행복하다는 것, 나의 인생에 열매와 나의 인생의 행복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삶을 살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여전히 다른 신들을 섬기고 미혹하게 서 눈에 보이는 것에 왔다갔다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늘을 달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여호와께서 행하신 모든 큰 일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망각하고 무너진다 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내가 무엇을 하는가를 고민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과 그 행하신 일을 마음에 담아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억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도 하늘을 열어 빌어 주시며 나를 돌봐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로부터 내려옴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손안에 나의 복과 은혜가 있음을 알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하나님께 매달리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예배자=loving, serving, obeying, trusting"
신 10,12-22 | 07-02-2020
모세의 간절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며 다시 그들을 살리시고 복되게 하시겠다…약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다시 십계명을 써 주시며 그 하나님의 은혜로 깨진 언약 관계를 다시 한번 회복시켜 주시며 기회를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다시 받으러 올라가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며 회복된 언약의 관계를 주신 이후에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게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내가 너에게 다시 한번 회복의 기회를 주는데 요구하는게 크게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예배자의 삶 혹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요구 하셨고요. 두번째는 마음의 할례를 받으며 교만을 꺾을 것을 하나님께서는 요구 하셨습니다. 즉 이 언약이 다시는 깨지지 않기 위해 약속을 깨지 않고 언약을 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두가지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예배하는 삶입니다. 예배자로서 살아가는 성도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loving, serving, obeying, trusting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의 회복의 이후에 요구하신 것이며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요구하신다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일날만 최선을 다해 드리는 예배자가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 자로 살아갈 때에 바로 이 네 가지 단어를 내 마음을 담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Loving, serving, obeying, trusting,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삶이며 혼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가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자로 살아가는 근거를 한마디로 정리해 주셨는데, 바로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소속이라는 것이죠.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 소속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소속 아닌 게 없다는 것이죠. 만물이 하나님 소속이니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소속이 아니면 말이 안된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소속이 안 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죠.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알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고 고백할 때 이 네 가지 예배자의 삶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우리는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며 저와 여러분들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최선을 다해 섬기는 예배자의 삶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삶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고백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고 교만을 꺾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이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변하는 것이죠. 몸에 할례는 마음의 할례에 대한 표현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통해 목이 곧아지지 않고 착각하지 아니하며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기 때문에, 신체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겉에 보이는 신체 일부분의 할례가 언약 백성의 증거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통해 내가 언약의 백성임을 알게 됩니다. 그럴때에 목이 곧아지지 않고 교만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와 교만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 된다는 것은 교만해진 다는 것이며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목이 곧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 되려 하는 자아 중심성의 삶은 교만한 삶이며 하나님을 구석으로 밀어내는 삶이며 그런 삶은 마음의 할례 가 행해지지 않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할례를 행하면서 목이 곧아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반드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정한 마음의 고백이 있으며 마음의 할례 가 있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처절한 의존성, 하나님의 신뢰가 바로 마음에 하는 할례 입니다.
특별히 “네 행복을 위하여…” 하라는 말을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결국 나의 행복을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연애인들에게 열광하는 팬들, 그 사람이 좋아서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렇게 열광하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착각하면 팬들이 빠져나갈 때 연예인이 공황 상태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결과죠. 결국 그 때 우리는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나의 행복은 어디서 부터 오는가? 바로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온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고 나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요구하신 두 가지를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loving, serving, obeying, trusting…하나님 마음에 할례를 하며 교만을 꺾는 그 삶 그 삶을 통하여 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하나님의 삶이 있음을 믿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매일 매 망각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언약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말씀에 매여 앞장서는 인생이 되라."
신 10,1-11 | 07-01-20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한 약속이니 그 약속을 생명과 같이 지키며 살아야 했지만 밥먹듯이 그 약속을 깬 것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 이었습니다. 항상 주님을 격노하게 하며 불신앙으로 나아갔던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주님이 주신 돌판을 깨서 부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화가 나서 그 돌판을 깼지만, 동시에 그 방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깨 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무용 지물이 된 돌판을 깨버린 것입니다. 그 깨트린 돌판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고 스스로 부패하며 속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목이 곧은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모세를 올라오라 하시며 두번째 판에 십계명을 써 주시는 것입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진멸되고 없어져야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품으시며 다시 한번 십계명을 만들어 주신 것을 통해 회복시켜 주시며 기회를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품으시는 주님의 사랑, 끝까지 언약을 회복시키시며 언약의 백성으로 남기 원하시는 그 한결같은 사랑,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깨진 언약에 대한 회복을 보여 주시는 것은 바로 다시 만들어 주시는 십계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10장 1절 말씀이고, 5절말씀을 보면 이 두번째로 만들어 주신 십계명을 궤에 넣으라 명령하셨고 그것이 지금까지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명령에 따라 법궤 안에는 세가지 물건을 넣어두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 그리고 두번째로 받은 십계명 돌판 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기적과 이사를 보여주는 영광의 물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이 세가지의 물건은 자랑이나 영광에 대한 물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극명히 드러나는 불순종의 상징입니다. 이 세가지 물건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능성이 없는 존재들이 인가를 상징하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과 불순종으로 나타난 기적이기에, 영광이 상징이나 기적의 상징이 아니라 불순종을 계속 remind하는 상징입니다. 두번째 받은 십계명 역시,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얼마나 인간의 제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불순종에 대한 처절한 고백의 상징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능성 없는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주심을 통해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에 따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고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용서하고 안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다 보는 것입니다. 나의 가능성 없는 죄된 모습이 그대로 보이며 그 죄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속된 불순종과 언약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자비하심이 그 불순종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며 어디를 갈 때마다 이 언약궤를 메게하시며 백성들보다 앞서 가게 하셨습니다. 구별된 레위지파 사람들이 그 언약궤를 매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장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적군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죽는 자리가 맨 앞에 있는 자리입니다. 가장 위험한 자리입니다. 앞장 서는 혜택도 없고 시달리기만 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욕먹고 가장 위험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의지하여 항상 먼저 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들이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에 앞장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매고 이 사람들의 백성들 가장 앞에 서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죽을 수도 있고 위험 할 수도 있고 욕도 먹는 그 앞자리에 서서 백성들을 보호하고 바르게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궤에 들어간 세 가지 물건,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 두번째 십계명 돌판을 기억하며 나의 자랑과 영광이 아닌 나의 부족함과 가능성 없는 죄인됨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로 서야 하겠습니다. 늘 주님 앞에 불순종하고 교만하고 늘 넘어졌던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 가운데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사명의 언약궤를 메고 맨 앞에 나가는 그 삶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늘 첨병과 같이 앞서나가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자신을 똑봐로 봐야 착각하지 않는다."
신 9,11-29 | 06-30-2020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 앞에서 나는 누구였는가에 대해분명히 기억하기 원하셨습니다. 자신을 똑바로 보고 착각하지 말아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백성이었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는지를 여러 과거의 사례들을 들려 낱낱이 드러내고 그 부끄럽고 불순종한 일들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착각하지 말고 하나님 떠나지 말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 미리 경고하시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불순종 사건이 오늘 말씀의 증언되는데 바로 금송아지 우상 사건입니다. 모세가 사십 주야를 금식하고 십계명을 받았을 때, 산 밑에서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진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백성입니다. 즉 하나님과 약속을 한 백성입니다. 약속이란 둘 중에 하나가 깨면 약속이 깨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거라고 약속하시며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이 얼마가지 않아 깨진 사건이 바로 그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사건입니다. 이 금송아지 사건을 지금 복기하는 것을 통해 그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는지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직시하면, “스스로 부패한자” “자신를 위해 우상을 만든자””목이 곧은 교만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부모 세대의 불순종을 보며 지금 너희도 똑같은 실수를 할 확률이 너무나 많으니까 잊지 말고 착각하지 말고 너 자신을 똑바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도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바라보며 우리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도 조금만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마음이 부패해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
나를 위해 우상을 만드는 교만함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저와 여러분들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고 불순종한 교만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의라는 것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가능성 0%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고 늘 진노하게 했던 백성이라는 것이죠. 한 두번 사고 치고 거역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래 왔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자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까지 온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고, 특별히 중보자의 간절한 매달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토록 불순종하고 목이 곧은 백성, 멸망과 진노로 사라지는게 당연한 백성들인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모세라는 중보자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가 백성에게 내리려는 것을 목숨걸고 매달리며 나갔고 하나님께 중보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40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매달려 완악한 백성 불순종한 백성을 놓고 생명을 건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100% 멸망 받아야 되며 100% 죽을 자들이며 형벌을 피할 수 없는 백성들인데,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지 않고 멸하시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 백성의 완악함과 죄를 먼저 보지 않으신 겁니다. 뭘 먼저 보신 것인가 하면 바로 중보자의 기도를 먼저 본 곳이죠.
이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중보자의 모습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나는 100% 죽어 심판받아야 하는 철저한 죄인인데, 생명을 걸고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중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먼저 바라 보시기에,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내 의로는 결코 천국 갈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what I’ve done을 보시는게 아니라, what Jesus has done, 내가 입고 있는 그리스도의 의외의 옷을 바라보고 우리는 구원 받는 겁니다.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서 저주가 passover한 것 같이 우리는 오직 은혜로 오직 십자가 보혈의 사랑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주님을 거억하고 항상 불순종했으며, 항상 교만하고 항상 주님을 진노케 하게 죄인이었지만 결국 나를 향한 그 중 보자 때문에 내가 그 은혜 가운데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저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을 막으며 스스로 그분에게 떨어지는 것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 때문에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바라보시며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자신을 똑바로 보면 볼수록 가능성 없는 내 부끄러운 모습을 직시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만 붙들고 겸손하게 엎드려 낮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의 하신 놀라운 의만 붙들고 살아가는 삶, 그 삶이 복되고 그 삶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았다는 이 고백 위에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마음속으로도 교만하면 망한다."
신 9,1-10 | 06-27-2020
오늘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착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을 두 가지 면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나안 땅을 너희가 들어가게 될 때, 광야 1세대들이 들어갈 때와 지금과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1절 말씀을 보면 성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크며, 그 주민들은 강하고….상황과 환경은 40년 전과 바뀐 게 없습니다. 그 싸움은 결국 눈에 보이는 너의 힘으로는 백전 백패하는 적들이라는 것입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과 같이 상황은 무시무시하고 적들은 강대하며,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대 열세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힘과 그들의 싸움에 능력은 이스라엘과 비교 불가입니다. 이길 가능성이 적은 싸움이 아니라 겉으로 봐서는 이기기 불가능한 싸움입니다. 그 불가능한 싸움이지만 이겨 놓고 싸우는 이유는 바로 나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신 내 앞에서 싸워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가지를 다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내 힘으로 절대 승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싸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앞서 싸우셔서 주시는 승리임을 잊지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승리하게 됐을 때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4절에 보면 “심중에…” 마음 속으로… 꼭 승리하고 나면 우리에게는 이런 생각이 자리잡습니다. 공로의식….공로를 따지게 됩니다. 겉으로는 다른 얘기하지만 마음속으로 계속 전쟁 이기고 땅을 차지한 게 나의 무언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믿어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은혜와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서 승리의 이 일을 찾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무너진다는 것이죠. 내가 지혜로워서, 내가 이쁨 받을만 해서,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셨구나…이렇게 심중에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뽑아내고 얼른 꿈깨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갖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였는가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자들…목이 곧은 백성들…결국 이렇게 반복적으로 그들의 불순종을 폭로하며 경고하시는 것은 이런 너의 현존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영적 교만에 빠지지 말고 착각하지 말라고 이렇게 비수와 같은 말들을 계속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에게서 공로를 찾으려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왜 그렇게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게 중요한가 하면,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인 되었음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되는 실수를 범하게 되며 나의 공로를 찾으며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하면 망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제발 듣고 깨달아 순종하라,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구원 받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천국 백성 되기 전 너가 누구였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나는 목이 곧은 자였고, 늘 죄에서 헤매던 종노릇하던 자였고, 하나님을 늘 불순종하고 격노하게 하는 철저한 죄인이라는 것 이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착각의 생각이 들 때마다 교만이 올라올 때마다 자꾸 나의 의와 공로를 꺼내려 할 때마다 내가 어떤 존재 였는지를 분명히 기억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도 채워지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오늘도 우리는 나아갑니다. 내 주변의 환경과 상황은 바뀐게 없고 내가 힘으로 싸워서 이길 수 없고 여전히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싸워 위해 싸워 주시는 그 놀라운 기적의 승리가 여러분들에게 경험 되기를 원합니다.





새벽묵상 "기억하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도 다 마음 가짐이다."
신 8,11-20 | 06-26-20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길을 걸으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인도함을 받아 낮은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마음이 가난해지고 영혼의 먼지를 털어내며 노예 근성에 때를 벗기며 교만과 우상을 깨는 시간을 갖게 하셨습니다. 오랜 광야 길을 끝내고 이제 가나안 땅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때 이 광야 정신과 마음을 잊지 않는게 바로 그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늘 조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고 반복 하셔도 어리석은 인간은 망각하고 잊어버립니다. 특히 인간은 남이 나에게 희생한 것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내가 희생하거나 손해 본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면서, 남이 한 희생과 손해로 받은 은혜를 오래 기억하는 자들은 정말 많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모든 것을 망각하는 게 아니라 망각하고 싶은 것만 망각하는 그런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의 마음 가짐에 따라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망각할 것을 망각하기에, 주님의 은혜로 내가 이 자리에 왔다 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 했을 때 하나님의 복이 여전히 머물러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을 때 그 은혜와 사랑을 우리는 가지고 산다 라는 것이죠.
14절의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염려가 마음에 깊이 담깁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여 대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릴까 염려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하나님의 경고에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은 광에 영성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높아질 확률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죠. 지금 가나안 땅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눈에 보이는 적들을 이길 수 있을까 없을까를 놓고 환경과 상황을 놓고 두려워하며 걱정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걱정하지 말고 너희가 진짜 걱정하고 두려워 될 건, 너의 마음이 교만 해져서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두려워하고 우리가 걱정에 할 부분이라는 것을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렇게 강조하셔도 똑같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여전히 무너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대표적 교만과 착각이 17절에 등장합니다. “마음에 이르기를….”속으로만 생각한 것이지요. “이 모든 복들이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린 증거가 결국 교만과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는데 실제로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이런 놀라운 복들이 결국 내 능력과 내 손의 힘 에서 왔다고 자꾸 착각하고 마음이 높아지는 겁니다. 주변사람들도 막 치켜세우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이정도 능력이 있으니까 이런 땅도 받고 승승장구하며 이 정도 재물을 얻었지… 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 없는 엎어 놓은 그릇과 같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철저히 고백하는 대신 자꾸 나에게서 이유와 원인을 찾기 시작하는 게 바로 교만과 착각인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그렇게 강조하며 주인임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 또한 구원에 있어 우리에게는 원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하나라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와 사랑, 그 분의 긍휼히 여겨 주심, 불쌍히 여겨 주심 외에는 구원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신앙 생활하다 보면 착각해서 내 열심과 헌신, 신앙생활의 어떤 것이 구원의 조건과 이유인 것처럼 자꾸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 교만과 착각이 자꾸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대신 내 능력과 힘을 의지하는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릴까 염려 한다.”는 경고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 담기는 경고가 되기 원합니다. 말씀을 잘 간직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늘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며 하나님이 주어가 되시는 인생을 잊어 버리지 않으며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잊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자가 말씀을 잘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벽묵상 "먼저 낮아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낮추신다."
신 8,1-10 | 06-25-2020
신 8장은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을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에 그 광야 생활을 왜 허락하셨는가를 알려주시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 광야 생활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광야 생활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변화시키신 것….바로 2절과 3절에 반복해 등장하는 “ 너는 낮추시며…” 입니다. 우리를 낮추시고… 너를 낮추시고… 가 바로 하나님께서 광야 길을 허락하신 뜻이라는 겁니다.그렇기에 그들에게 하나님만 겸손히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마음에 품으며,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살아가는 훈련을 하게 하신 것이 과로 광야생활 이었습니다.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광야 생활 40년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환경적으로 아무것도 없이 오직 하늘만 바라봤던 광야, 생활은 어려운 시간이자 눈물과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생을 허비하는 것 같고 낭비 했던 것 같은 광야 40년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고 낮아지고 겸손하게 조율하는데 유익한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 있었던 노예 근성과 자아 중심성을 꺽게 하시며 자기를 낮추어 겸손하게, 마음이 가난해지는 시간을 갖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 의 마음도 우리의 마음도 광야에서 스스로 높아지려는 천성과 열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위를 지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 길을 걸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인도함을 받아 그 삶의 영혼의 먼지를 털어내며 노예 근성의 때를 벗기며 교만이 라는 우상을 깨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길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2절 말씀을 더 보면 “너를 시험하사…” 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즉 마음을 계속 test하신 겁니다. 내 마음이 어떠한지…. 결국 그 마음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진짜 두려워 할 것을 두려워하며,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 진짜 마음을 이제 출애굽 했기 때문에 애굽을 뒤돌아보지 않고 마음에 품지 않으며 진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 신과 약속에 땅만 마음에 들고 살아가는지….그들은 몸은 빠져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노예 근성에 사로잡혀 있었고, 약속의 가나안 땅을 마음에 품는 대신 애굽을 동경하며 그리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을 상황과 환경에 압도 당하며 벌벌 떨며 두려워하며 못가겠다고 돌아갔던 그 불순종의 백성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신 적과 환경과 상황을 두려워하며 다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어갔던 시간들…..그 모든 과거의 시간들을 복귀하며 결국 광야 시간을 통하여 내 마음이 어떠한지 내 마음이 주님께 합하여 있는지 내 마음이 주님이 중심이 되어 있는지 그것을 변화시키며 확장시키며 공사하는 시간이 바로 광야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며 누구나 우리는 광야 학교를 걷게 됩니다. 광야 길을 걷게 된 때 하늘을 바라보고 내 자아 중심성과 노예 근성의 때를 벗기는 시간이자, 하나님께 매달리는 시간임을, 나를 낮추시고 내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 조율 받는 시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면 그 광야 학교 생활이 나에게 영적인 성장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시간이 됨을 뒤돌아 고백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이 광야 생활을 허락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걷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광야길을 걸어가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존재는 바로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절 말씀과 같이 떡으로만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자, 즉 영적인 존재임을 알게 하시는 게 바로 광야 생활의 목적이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내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런 삶이 기본적인 부분을 해결하고 나면 떡으로만 해결 받지 않는 수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결국 우리는 떡이 꼭 필요한 존재며 떡이 어느정도 채워져야만 하지만, 동시에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광야 생활을 통해 알게 하시고 기억하게 하신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먹어야 사는 존재이자 내 영혼을 채워야 사는 존재입니다.
이 신명기 8:3은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실 때 사용하시며 그 유혹을 이기셨던 말씀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했는데, 결국 이 세상에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이란 떡으로만 사는 인생인줄 착각하며 무엇이든 떡으로 만들려 하는 가치입니다. 돌도 떡으로, 학교도 떡으로, 관계도 떡으로, 사람들도 떡으로 만들려는 것, 심지어 교회도 떡으로 만들려는 것, 이게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이 말씀으로 사단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떡이 필요한 존재이지 떡으로 그 사람의 존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입술로 나온 말씀으로 살아가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죠. 내 인생의 가치가 떡으로만, 몸값으로만 결정되는 인생은 비참한 인생입니다. 떡이면 다 되고 돈만 있으면 되는 인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사는 존재 내 영혼이 채워지고 내 영혼이 말씀으로 배불러 져야하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이 세상에서 떡을 필요한 존재로만 한정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시고 우리를 훈련하시는 삶의 중요한 가치관 훈련입니다.
그렇게 내가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광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만나와 같이 하늘이 주시는 양식을 먹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나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복을 주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늘 공급해 주시며 의식주에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모자라지 않게 부족하지 않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며 떡이 다인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영혼의 양식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며 그 삶을 살아내는 존재가 성도입니다. 광야 생활은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둔 훈련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의 중심이 끊임없이 주님 외 다른 것들을 두려고 하는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삶, 미끼를 덥석 물지 않는 삶, 그리하여 우리는 말씀으로 계속 연단 받으며 말씀을 통하여 강해지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공급하심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새벽묵상 "상황을 두려워하지말고 하나님 망각할까 두려워하라"
신 7,12-26 | 06-24-2020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순종의 복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 여러 기억장치를 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순종의 복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3-15절까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반찬과 같은 복들을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을 순종하면 함께 은혜로 눈에 보이는 복들도 부어 주시겠다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조건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잊지 않고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이렇게 훈련시키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 시키시는 이유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른 길로 가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가운데 있는 것, 이것 자체가 복의 본질임을 알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법도를 듣고 지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 복이며 당연한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복가운데 거하기에 주님 뜻 가운데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을 준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려워 하지 말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착각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싸움은 우리의 힘으로 싸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환경과 상황에 눈이 고정되면 내 심중에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느냐….백전 백패라는 패배의 마음이 이미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과 같은 것입니다. 즉 겉보기에는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군사적인 숫자나 무기의 수준들을 비교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백성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는 게 당연하고 그 마음에 패배주의와 실패로 무너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광야 1세대는 이 가나안 땅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을 의심하고 불순종하며 상황과 환경에 압도당하며 그림자와 같은 저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하며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위해 마음에 새겨야 한 진리는 이 전쟁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서 싸우는 싸움이고 눈에 보이는 적과 싸우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일으켜 싸워 주심을 믿으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바라보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전쟁이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능의 힘과 손을 의지하여 치르는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환경과 상황과 적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두려워할 것은 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은 차지했는데, 그 땅의 문화와 종교가 이스라엘 백성을 무너뜨리는 올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반복적으로 올무가 되지 않도록 진멸하고 취하지 말고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진짜 두려워 될 것은 상대를 두려워하거나 환경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눈을 딴 대로 팔아 순종의 법 에서 벗어나 올무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짜 두려운 것인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기적이 열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 가면서 이 환경과 적들을 비교했을 때 절대 이길 수 없는 이 싸움을 이길 수 있을까 말까를 두려워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 싸움에서 이길수 있을지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건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싸움이니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여 승리하고 진짜 두려워 할 건 승리 이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에서 올무에 걸리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압도 당하고 두려워합니다. 마음속에 어떻게 이 사람들을 쫓아 낼까 어떻게 이길까....이것은 거의 진 싸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이라면 이 시간 하나님을 바라 보시고 하나님이 먼저 보이는 기적을 놓고 기도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며 하나님의 힘과 권능의 의지하여 우리가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과 상황에 매몰되어 내가 올무에 걸리며 하나님을 잃어 버리며 하나님의 순종의 이래서 떠나갈 것을 두려워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많은 믿으며 나의 이 일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며 이 땅의 물들지 않고 이 땅에서 진리의 빛을 비추며 기준 삼아 주님의 은혜와 법도 가운데 머무는 것임을 잊지 않을 때 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가 나에게 현재형으로 오늘도 이 시간 부어 질 줄 믿습니다





새벽묵상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의 인생을 해석하라."
신 7,1-11 | 06-23-202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앞에서 두가지의 중요한 정체성을 알게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두 번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아무리 본인 자신만 바라보고 연구해도 답이 안 나오고 오직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 봐야만 자기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인가를 알고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잊지 않는 것이 가나안 땅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9절 말씀과 같이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데 그들의 정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알라…”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며, 오직 여호와만이 신실 하시며 오직 여호와만이 그 언약을 끝까지 베푸시며 그들을 사랑하시는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는 알라 라는 말은 너는 잊지 말라는 말이죠. 가나안 땅에 가서 전쟁을 하게 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고 승리하게 될 때 결국 하나님이 누구신가 를 붙들고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순종하며 나아갈 때 그런 복들이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하나님 이 누구신가 를 잊지 않는 방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이 인생의 발견하게 되는 많은 것들 많은 승리들이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묘사하는 1-3절은 모든 동사들이 다 하나님이 주어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동태, 즉 다 선물로 받는 겁니다.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시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며, 하나님이 적들을 쫓아내시며 이 모든 것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이 많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싸워서 이긴 것 같고 그들의 능력이 있어 가지고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하나님이 주어임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면 내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하나님이 택하신 이유는 은혜 밖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거죠. 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는데 그 택한 것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똑해서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전자가 더 우월해서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뭔가 사랑받을 말한 일을 해서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 자신들에게는 그 원인과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유를 굳이 꼽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택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인도하시고 승리하시고 쫓아내기도 하셔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되고 풍족함을 누리게 될 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일하심의 결과이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며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택함받은 것임을 잊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붙들고 사랑하는 것,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착각을 한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쁜 받을만 해서 택함 받은 거라고…. 구원 받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자기 안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죠. 내가 이렇게 해서 내가 저렇게 헌신해서 내가 태생이 좋은 믿음의 가문에 있어서 자꾸 이유를 붙이고 자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 순간 그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모두 은혜로 주신 선물인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리게 되고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위험성이 너무 많았고 그런 일이 실제로 나중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언약 또 맺지 말고 혼인 도 하지 말고 그들과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 경고하십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드는 그 유혹이 바로 가나안 땅에 물드는 겁니다. 가나안의 그 풍족한 문화에 물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들이 우리를 유혹해서 여호와를 떠나게 만들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부모 세대인 1세대가 그렇게 무너졌던 거와 같이 너희도 그럴 수 있는 위험성이 가득하 그러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경고하는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성도로서 우리도 동일한 고백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까? 우리가 남들보다 특별히 잘나서 선행을 많이 해서 신앙의 열심히 있어서 이런 것들은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를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그거 외에는 이유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심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나라는 존재 그 정체성을 깨닫고 잊어버리지 않을 때 나는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아 갈 때 십자가 사랑을 붙들고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죠. 결국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잊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그 놀라운 일을 기억하며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은혜와 사랑만으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믿음의 대상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 사랑과 십자가 은혜에 빚진 자로 오늘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묵상 "반복과 노출, 시각화로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
신 6,1-9 | 06-19-2020
오늘 말씀은 신명기의 주제 본문이라 할 수 있는 “쉐마 이스라엘….”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등장합니다.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 신이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야 될 하나님의 말씀에 핵심인 것이죠. 쉐마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마음에 담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경청해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 마음에 새겨져 삶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명기가 반복해 강조하는 쉐마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에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라는 것을 강조하며 반복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담아 기억하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반복입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나 이 말씀을 강론하는 것….소위 말하는 반복 교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말씀 그대로 가감하지 않고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시내티에서 목회할 때 신시내티 대학에는 한국에서 유학을 와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 음악 전공하는 다양할 악기 전공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전문가가 되기 위해 연습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것이죠. 자기가 악기를 하루 연습 안하면 본인이 알고요. 악기를 이틀이나 삼일 정도 연습 안하면 주변 동료들이 다 안답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연습하지 않으면 오케스트라가 다 안답니다. 그게 그들이 끊임없이 반복 연습하는 음악도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그것이 프로가 되는 비결이며 크게 나아가는 자들의 특징입니다.우리는 단순 암기나 반복을 창의성이 떨어트리는 잘못된 교육으로 잘못 오해합니다. 토론하는 것도 중요하고 자기 의견을 내는 것도 좋은 교육방법이지만,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반복의 힘 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예전에 서당에서 천자문을 훈장 선생님이 가르치는 방법은 그냥 음독이었습니다. 음독이 뭡니까? 애들이 뜻을 알던 모르던 무한 반복해서 읽고 따라 는 것이죠. 그렇게 어려서부터 마음에 새겨진 진리가 나중에 철이 들게 되면 그 의미를 깨달으며 그 인생의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자녀들에게 가르치는게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마음에 새기며 습관화 하며 그것이 나에게 반복적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며 우리 자녀들에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8-9절은 마음에 새기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의 시각화와 노출의 중요성을 증언합니다. 수천년 전에 깨닫게 된 반복적 노출과 시각화의 광고 효과입니다. 요즘 시대엔 광고라는게 결국 반복적인 노출로 시각화하는 것입니다. 그 반복된 노출이 뇌에 저장되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 제품에 대해서 호감이 가 지갑을 열게 하는게 광고의 효과인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고 마음에 새기기 위한 좋은 방법이 집안에서 노출 빈도를 높이는 여러가지 방법을 명령하신 것이죠. 그게 말씀을 손목에 매는 것입니다 손목에 붙인다는 것은 항상 차고 다닌 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려서부터 내가 가는데 어디나 하나님의 말씀이 따라 간다는 것을 시각화하며 배우는 것입니다. 미간에 붙이는 건 바로 내 눈과 눈 사이에 붙이는 거죠. 사물을 보기 전에 사람을 보기 전에 먼저 말씀이 보이게 하는 게 바로 미간의 말씀을 붙이는 겁니다. 미간의 말씀을 붙여 어떤 것들을 보기 전에 말씀 으로부터 먼저 모든 것을 보라는 것을 시각화하며 반복 노출하는 것입니다.
문 곳곳에 붙인다는 것은 내가 가는 곳마다 붙인다는 것입니다. 문이라는 것은 중요한 인생의 결정을 하는 관문이기에, 인생길에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에 제일 먼저 상황과 환경을 분석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바라본다는 것을 시각화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어려서부터 말씀을 손목에 매고, 말씀을 미간에 붙이고, 문 곳곳마다 말씀을 붙이는 것을 통하여 가정에서부터 말씀을 시각화하고 반복 노출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마음에 새긴 자녀들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에 도출된 자녀들이 그들의 가치관과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시각화 되며 하나님 말씀의 그 의미를 내 삶의 체화하고 생활화 하는 것을 통하여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며 이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써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는 그 정체성과 구별됨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선명하게 삶으로 드러나시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항상 순종의 마음을 품고 복 가운데 머물라."
신명기 5,22-33 | 06-18-2020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광야 2세대들을 향하여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따르는 삶을 강조하시며 십계명을 다시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계명을 잘 지켜 그들의 당대 뿐 아니라 그 자손까지 복 받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며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그들에게 주신 이유 입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잘 지키면서 하나님의 복 가운데 거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십계명을 받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게 뭐냐면 27절 말씀을 보게 되면 그들이 어떤 결단을 했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고 그들 스스로 다짐을 한 겁니다. 오늘 세 번이나 반복되는 말은 뭐냐하면 “듣고 행하겠나이다….” 입니다. 27 절에도 나오고요 30 절에도 듣고 행한다는 말이 나오고 33 절에도 모든 도를 행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행한다른 말이 3번이나 반복되는 것이죠. 여기서 듣고 행한다는 말은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다는 말이죠. 그게 29 절에 나오는 모든 명령을 지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거기에 복이 있다는 걸 지금 발견한 겁니다.
그렇게 다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28절에서 하나님이 굉장히 기뻐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내게 말하는 말소리를 들은 즉 그 말이 다 옳도다…” 하나님의 마음이 확 다가오며 느껴집니다.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영원히 그들과 자손이 복 받기 원하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되게 하기 위해 주신 것 기억 하시겠지만 안전벨트 와 같이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를 위기 가운데 건져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벨트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계명을 주신 이유이며 우리를 궁극적으로 복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그 마음을 항상 똑같이 품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변치 말고 그 마음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영원히 복 받기 원한다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예수님이 그 말씀 가운데 은혜를 붙들고 하루하루 주님 은혜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오늘 말씀의 결론과 같이 나타나는 균형 잡힌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인생…이것이 바로 항상 같은 마음을 토너 영원히 복 받기 위해 우리가 늘 주님안에서 조율 돼야 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좌로 치우치면 오른쪽으로 좀 조율이 되고 오른 쪽으로 치우치면 왼쪽으로 다시 조율되며 늘 하나님의 기준에 조율되는 인생,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기쁨되는 삶을 살기 사모하십니까?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그대로 살겠다는 그 마음 잊어버리지 말고 그 마음 그대로 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율되는 거룩한 부르심 가운데 서 있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항상 이 마음을 품어 영원히 복 받기 원하시는 그 주님의 마음을 따라 매일 매일의 삶이 주님의 복 가운데에 늘 거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내 가치가 몸값에서만 나오면 비참한 인생이다."
신명기 5,12-21 | 06-17-2020
우리는 계속해서 광야 2세대들을 향하여 주신 십계명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첫 세계명은 대신 관계를 정의하고, 대인관계를 정의하는 5-10계명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를 연결하는 핵심이 바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네번째 계명입니다. 안식에 대한 십계명을 증언하는 부분이 굉장히 구체적이고 아주 세세한 지침까지 주시는 게 신명기 5장의 안식일 계명입니다. 특별히 출 20장과 비교했을 때 안식이 대한 규정이 가장 길게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일상의 삶 속에 드러나는 게 바로 안식을 지킨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이 회복해야 하는 것은 약속의 땅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안식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결국 내가 하나님 안에 안식이 있냐 없느냐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존재가 되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된다는 것이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통해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그 형상됨을, 내가 하나님 자녀임을 고백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인류와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거룩함을 누리며 주님 앞에서 안식을 누리며 나 다움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다움 하나님의 창조 질서 가운데에 하나님이 주신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 바로 안식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기쁨인 안식의 참여하고 동참하는 것이죠.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지면서 하나님이 주셨던 선물인 안식을 잃어버리고 나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고, 안식 없이 기계와 같이 살아가는 나 다움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종이 됐다는 의미가 뭡니까? 바로 안식이 없었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닌 그냥 노동력으로만 자신이 평가받는 종이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안식 없는 인간으로 살았어요. 종이란 물건과 같이 사고파는 개념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런 종의 삶이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삶이며 이 세상이 강요하는 삶이요. 월급이라는 말을 몸값이라 쉽게 말하며 나의 가치가 나의 노동력, 몸값에 더 나오고 물건과 같이 사고 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개념, 사람을 상품과 같이 생각하는 이 가치와 개념이 바로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바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없는 수많은 인간들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깨진 관계에서 나오는 안식이 없는 삶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도 우리도 하나님께 구원 받아야 되는 존재가 된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기 전 이런 존재였다….라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그들을 출애굽 시켜주신 그 사건은 우리가 인간적인 어떤 노력으로 얻어진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셨습니다. 광야 2세대는 애굽의 종살이를 경험한 적이 없고, 홍해를 건넌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통해 광야 1세대가 경험했던 구원의 은혜인, 출애굽을 망각하지 않고 현재형으로 마음에 새길 것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지침이 바로 오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속하신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선포 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쉼,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 없이, 예배의 삶도 없기 그냥 자신을 노동력으로만 가치를 찾고, 자신을 기계와 같이 노동력의 가치를 증명받기 위해 오늘도 그냥 뛰고 달려가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 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노예가 아니고 너희는 물건처럼 사고파는 존재가 아니고 너희는 노동력이 아니고 너희는 안식을 통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이 안식일의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 누리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남종과 여종, 다른 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냥 가축들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가축들의 이름도 다 얘기하며 동물들도 다 안식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안식일의 확대 적용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과거를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서 쉬는 게 먼저고, 하나님 앞에 예배 하는 게 먼저고 하나님 앞에 그 구원을 기억하며 하나님 안에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 바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한다는 놀라운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점점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 본질은 안식이 무너진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가치가 무너진 이 세상 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으로 주신 게 안식일임을 알게 됩니다. 안식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게 아니라 안식은 명령어 주신 반드시 지켜야 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식일을 생명과 같이 지키며 안식일을 우선순위에 두면 바로 안식일을 구별하며 거룩하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치가 회복되며 안식이 회복되며 구속이 회복되어 우리가 안식이 없이 종과 같이 노예와 같이 물건으로 사고 팔며 노동력의 불과하다 고 믿는 그런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됨이 회복되야 삽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가치가 나에게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의 명령인 이 안식일을 지켜 내 삶이 주님 안에서 예배를 회복하며, 쉼을 회복하며 거룩함을 회복해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을 분명히 붙들고 거룩하며 구별되어 하나님의 창조 된 자녀로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하나님만 섬기던지, 나를 위해 우상을 만들던지"
신 5,7-11 | 06-16-2020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과 신명기 5장의 십계명은 겉으로 봐서는 똑같아 보이지만 듣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신명기 5장에서 모세가 선포하는 십계명을 듣는 대상은 가나안 땅을 앞에 둔 광야 2세대 입니다. 그 듣는 대상이 다르다 보니 똑같이 십계명을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조점과 관점이 출애굽기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5장에서의 십계명 말씀은 훨씬 공동체와 삶의 문제에 대해서 방점을 가지고 강조하고 있으며 십계명을 쭉 나열하는 게 아니라 굉장히 디테일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광야2세대는 우선 홍해를 건넌 기억이 없습니다. 광야 1세대에게는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노예된 우리를 구원 하셨다 이렇게만 말하면 끝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피부로 경험하고 체득한 세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광야 2세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서 홍해를 건넜다는 것을 경험에 기초한 복기가 아니라 기억의 형태로 다시 가르치는 이유는, 그들은 홍해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에서 반복과 구체적 설명이 많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가나안 땅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 우상과 세상 가치관이 가득했기에 정신 차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 망각하고 무너지고 그곳에 물들 확률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신앙의 싸움을 붙들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광야 2세대가 치루게 될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 군사적인 전쟁이 들어 있지만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는 신앙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적 전투인 가나안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 많은 신뢰하며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언약을 잘 지키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십계명을 다시 한번 알려주는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은 십계명의 첫 세 계명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죠. 처음 세 계명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대신 관계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대신 관계라는 것은 다른 신을 온전히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거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가장 첫 단추,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첫 단추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두지 않는 삶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들어오고 바라보는 것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너무 무리 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말이 안된다 생각하는 분들은 결혼해 관계를 생각해보면 금방 수긍할 것입니다. 계약이라는 그 결혼 약속이란, 그 사람만을 두는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아내를 두지 말라, 나 외에 다른 남편을 두지 말라.. 이게 무리한 요구 입니까? 결혼을 했다는 것은 그 언약 가운데 그 남편만 그 안에만 사랑하고 그리고 다른 남편 다른 아내를 두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당연한 요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 하나님 만을 섬기라 말씀하시는 그 요구는 당연한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그 언약은 한쪽이 깨면 약속 자체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깨실 확률이 0% 입니다. 구약의 모든 스토리들은 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계속 반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며 깨뜨리는 역사를 증언합니다. 그 당연한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많은 매달리고 하나님께만 붙어있어야 너희는 가나안에 들어가 승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첫 번째가 순조로워지고, 첫 단추를 잘 매는 기본은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다른 신들을 두지 않는 오직 하나님만 꼭 붙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계명이 바로 8절 부터 10절 까지 말씀인데, 우상을 만들지 말고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두지 않게 되면 당연히 이런 우상이나 형상을 만들지 않게 되는데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오직 보지 않고 마음이 흐려지고 망각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우상을 만들게 되고 형상을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고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영어로 이야기하면 하나님 대신 substitution을 두는 겁니다. 다른 대체물을 두는 것이죠. 그래서 우상을 찾고 만드는 겁니다.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한정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만들며 나의 하나님이라는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대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버리는 거죠. 그것이 바로 우상을 만들고 형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그 내면에 있는 동기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너를 위하여” “자기를 위해”가 강조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다른 것을 형상화 하며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지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붙들고 살지 못하면 가나안 땅 가서 너희는 필연적으로 무너진다 라는 것을 지금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이게 너희에게 죽고 사는 문제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섬기라는 명령이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당연한 요구임을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하나님만을 꼭 붙들고 떠나지 않는 언약의 백성으로 승리가운데 살아가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눈을 돌리며 마음에 다른 것을 품으며 하나님 대신 형상을 만들고 우상을 만들며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안 땅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명령이자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마음으로 듣고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새벽묵상 "예수님이 나의 도피성 되심을 경험하라."
신 4,41-49 | 06-12-2020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오직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는 삶,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을 순종하는 삶 많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오래 살 수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고 떠나고, 우상을 만들고 형상을 만들게 되면 결국 무너지고 망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시며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들을 받아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자비하신 하나님,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포기 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대한 구체적인 예가 오늘 말씀에 나오는 도피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율법에 대한 말씀을 강조와 함께 도피성 설치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할 것을 강조합니다. 요단강을 기준으로 요단강 동편에 세 개의 도피성, 요단강 서편에 세 개를 설치합니다. 이 도피성 제도를 알려주시고 실행하게 명령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 때, 항상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배려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을 수 있는 한 개인, 그 인권을 보호하는 제도가 바로 도피성인 것이죠. 남을 죽이면 그대로 죽어야 하는게 율법이고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생명과 같이 지키라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셨고 그런 율법을 통해 생명 존중에 대한 분명한 원칙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살인은 과거의 원한으로, 아주 의도적으로 일어납니다.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장 최전선에 내보낸 것,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가 직접 죽인 건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윗이 살인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원한을 가지고 나쁜 동기를 가지고 그를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살인죄를 커버하지 못하는 회색 지대가 존재할 수 있는데, 원한도 없이 실수도 사람을 죽이게 된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의 원한이 전혀 없이 부지중에 살인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의도성이 없이 실수로 죽인 과실치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원칙에 의하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게, 이처럼 그 율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회색 지대를 도피성이라는 제도를 통해 은혜로 구제해주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cctv 도 없이 오로지 사람의 증언들만 가지고 판결을 해야 되는데 의도적인 살인과 이런 과실치사를 구별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 옛날에 말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은 이런 중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과실치사로 의도성이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도피성은 결국 은행을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도피성 제도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는 거기 필요하지만 동시에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구약의 이 도피성을 통해 우리는 복음의 은혜를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율법을 통해서는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 법을 피해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죠. 결국 구약의 도피 성 을 통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는 법으로는 100%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사람도 예외없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품고 피하실 바위 되신, 은혜의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피난처가 있다는 것을 이 복음을 통해 바라보게 합니다. 이 구약의 도피 서울 통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난처가 필요했던 것 같이 우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그런 필요한 피난처가 있음을 알고 그 온전한 피난처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 분이 피할 바위가 되시며 우리를 품어 주시는 그 은혜 가운데 우리가 이 지금을 살고 있을 그 놀라운 은혜를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이라는 제도를 통해 우리는 장차 오게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놀라운 은혜를 바라보고 그분 안에 있어야만 사는 영적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도피성 되셔서 우리를 멸망으로부터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도피성 되심을 경험하는 인생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는 삶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나를 결코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않으심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에게 생명의 도피 성을 허락해주신 큰 은혜를 이 시간 바라보시길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은 피하라"
신명기 4,25-40 | 06-11-2020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신 형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경고를 계속 이어 가십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금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않고 스스로 우상을 만들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에 대해서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하고 형상을 만들게 되면 그들이 속히 망할 것이고 전멸 될 것이며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자 언약을 저버리는 행동이기에, 질투 하시는 하나님 그런 더러움과 타락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소멸하는 불로 징계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들어가게 되는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차지하고 승리 하겠지만 가나안의 문화에 동화되고 물들어 무너질 확률이 굉장히 높음을 이미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슬픈 예감이 틀리지 않는 것이 역사로 증명되는 것 같이 변질되는 신앙을 가지고 살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다시 한 번 경고 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변질되지 않도록 들어가기 전부터 미리미리 알려주시는 겁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강조되는 " 고생 다하고 마지막에 돌아오는 어리석음"을 깊이 묵상해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 듣고 결국 다 무너지고 고생할 걸 다 하고 당하다가 끝에 가서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와 그 말씀을 청종하게 됨을 증언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꼭 본인이 몸소 체험해야만 알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책을 통해서도 주변에 어른들을 통해서도, 말씀을 통해서도 꼭 겪지 않아야 되도 피해가도 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는데 그거 다 무시하고 듣지 않다가 몸소 환란과 어려움을 다 체험하고, 피눈물을 쏟고 나서야 깨닫고 돌아오는 어리석은 인생이 많습니다. 듣고 망각해 꼭 붙어있지 않고 불순종해서 이런 험한 꼴을 온몸으로 다 당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돌아오면 좋은데 마지막에 겨우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불쌍한 인생 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헤 하나님을 믿고 붙들지 않는 결과가 이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열심히 중요하고 내가 신앙을 주먹쥐고 달려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 나는 무엇을 향한 열심히며 누구를 향한 열심 인지를 늘 체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 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렇지 아니하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환란 다 당하고 어려움 다 당하다가 끝날에 손 들고 돌아오는 겁니다. 이런 어리석은 인생을 반복하지 않고 피할 고생은 미리미리 피하며 사는 지혜로운 자가 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신 겁니다. 이런 실패를 바라보고 제발 하나님의 말씀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라 말씀하십니다.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다하고 돌아오는 그런 어리석은 인생을 피하라, 하나님이 미리 주신 경고를 마음에 새기시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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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스스로 부패한 증거가 나를 위해 만드는 우상이다. "
신 4,15-24 | 06-10-2020
우리 어제 말씀을 통하여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잊지 말아야 될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순종하는 백성이 복받는 자가 됨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직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는 삶이지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혼과 같은 언약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 거룩한 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언약은 뭐냐 하면 평생 다른 남편과 다른 아내를 두지 않고 친밀한 관계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신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직 한 아내만 오직 한 남편만 사랑하고 마음에 두는, 이 오직의 관계가 안되면 그 관계는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과 이 언약을 맺으시면서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누차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가장 중요한 명령이기도 한데, 어제 말씀을 우리가 빌리면 오직 여호와께만 붙어 떠나지 않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고 떠나지 않는 삶을 잊어버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등장하는게 바로 형상을 만들고 우상을 만드는 겁니다. 그것이 십계명의 두번째 금지 계명인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그 계명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서술하면서, 각주를 달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계명을 잘 지켜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에 우상 숭배 금지를 명령하시면서 강조하신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를 주목해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는 삶을 실패하게 되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우상을 만들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의 타락의 증거이자 스스로 부패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패하여 만드는 우상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마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대상으로 형상화 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바로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스스로 부패함의 증거입니다. 열심을 다하고 신앙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 우상 숭배에 신앙에 빠져 있으면 결국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상을 만들고 형상을 만드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이토록 시시콜콜히 구체적으로 금지 조항을 다 만들어 주셨습니다. 짐승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남자와 여자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새 형상도 안되고 곤충의 형상도 안되고…결국 어떤 모양으로도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동시에 당시에 이런 우상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런 문화를 숨쉬고 살아 가게 될 거라는 것을 미리 경고 하신 것이죠. 주변사람들은 다 이렇게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으며 신을 이용해 나의 풍요와 내가 원하는 이익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런 우상숭배가 팽배했던 시대에, 그런 문화를 접하고 숨쉬고 살아 가게 될 때에, 절대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24절에서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증언하는데, 우리 생각의 질투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말은 거룩하지 않음, 더러운 것에 거룩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거룩하지 않은 것과 더러움에 대한 반응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이 거룩해야 되고 깨끗해야 되고 구별되는 것이 그렇지 못할 때 거룩한 하나님이 반응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천국 백성으로 구별 받은 그들은 이세상에서 달라야 되고 깨끗해야 되고 거룩해야 되는데 거룩하지 않고 더러워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 하시며 반응하심, 그게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마치 저희가 주일 예배 때 배웠던 예수님께서 더러워진 성전을 향하여 참지 못하시고 진노하사 그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 하셨던 거 같이 바로 거룩해야 되는 마땅히 거룩해야 되고 마땅히 깨끗해야 되고 마땅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어야 되는 것이 더러워지고 거룩하지 않았을 때 거기에 반응하시는 분이다… 이게 바로 뭐냐하면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립니다. 내 마음이 부패하여 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자꾸 끌어다 쓰려 하는 그런 위험성이 많습니다. 정신 안차리면, 미혹당해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게 되면 결국 우상에 휘둘리고, 우상에 절하게 되며, 결국 나의 모든 것을 헛된 것에 거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붙어 떠나지 않는 삶, 우상을 만들어 무너지지 않는 삶의 비결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망각하지 않고 현재형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 모든 근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내가 이 자리에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 것에 휘둘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는 삶을 사랑하는 비결은 내가 이 언약의 백성임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비결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복 가운데 머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새벽묵상 "오직 하나님께 붙어 떠나지 말라."
신 4,1-14 | 06-09-2020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간절히 원했던 소원인 가나안 땅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 말씀하시며 너의 사명은 여기까지라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제가 모세의 입장이었다면 많이 섭섭하고 아쉬워서 나머지는 될대로 되라며 그냥 하나님의 사명을 다 내려놓고 인생을 끝냈을 수도 있을 거 같은 마음이 듭니다. 그 땅 밟아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40년을 그 꿈 하나로 여기까지 백성들을 이끌고 왔는데, 하나님 정말 너무 하시네….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할거 같은데, 모세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위대한 점은 모세 간청이 거절 됐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사명자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죽기 직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광야 2세대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고 따라 사는 것이 복임을 다시 한번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너희가 누리 될 가장 중요한 복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서 복을 누리며 사는 비결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목적대로, 즉 하나님이 가르치신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준행한다는 것은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을 살며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모세는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 행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이것을 정말 믿으십니까? 내 인생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행복의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삶, 그래 진정한 복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는 인생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지키는 게 복의 근원 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것을 얻게 되리라 그랬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은 자신들의 힘이 쎄서 자신들이 잘 해서 얻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 즉 선물이라는 것이죠. 성도로서 우리가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 믿는 신앙의 근간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내 자녀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내 직장도 내 재물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고백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나의 땀에 노력, 열심의 결과가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자,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의 비결이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가감하지 말고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고 머리 굴리지 말고 가감하지 말고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지키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하나님의 충분한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을 잘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조차도 순종 전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런 어리석음을 자주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취사 선택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주인 인 것 처럼 착각하는 삶이 하나님의 계명을 가감하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충분한 말씀 가운데 거하는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주장을 정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내가 허용하며 그 말씀 가운데 내가 진짜 변화된 것을 누리는 삶 그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자 라는 것이죠.
특별히 4절 말씀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는 너희들..” 이 저에게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뜻대로 순종하는 자 의 삶은 결국 뭐냐면 하나님께 붙어 떠나지 않는 삶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오직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알아야 동화되지 않고 물들지 않는 삶이 되는 겁니다. 신약의 요한 복음의 말씀을 빌리면 포도 나무와 가지 같이 붙어서 그리스도 안에 떠나지 않고 꼭 붙어 공급받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을 누리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고 떠나게 되면 바알 브올의 사건을 다시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민 25장에 등장하는 브올 지방의 바알 우상을 섬기고 무너진 사건으로 이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선 2만 4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이셨던 사건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오직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아니면 이런 바알 브올의 불순종 같은 일을 반복할 확률이 굉장히 많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에 물들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비결이 오직 내가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오직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는 우리에게 주님의 보기 있음을 잊지 마시고 오늘 하루가 내 삶 가운데 주님만 붙들고 떠나지 않으며 주님께 공급받는 것이 나의 생명의 힘을 믿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뜻을 순종하여 나의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놀라운 하루가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내 생각을 고집하면 인생 끝이 어려워진다."
신 3,23-29 | 06-06-2020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와 광야 생활 역사에서 모세라는 사람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어느 누구에게도 대체될 수 없는 대단하고도 놀라운 지도자였습니다. 여든 살의 나이에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 가운데에 그를 부르셔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목숨을 걸고 바로 왕 앞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렇게 출애굽을 하고 나니 꽃길이 앞에 있었던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온 것은 광야 생활이 얻습니다. 그 40년의 광야 생활동안 그들을 이끄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불평하는 백성들은 모세의 리더십에 늘 도전하였습니다. 끊임없이 애굽을 동경하고 뒤돌아보며 왜 구원했냐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세를 견디게 했던 힘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그것을 붙들고 모세는 광야에서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 중보하며 하나님께 매어 달렸고 결국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인도한 것입니다. 그 정도로 모세야 말로 대체 불가능한 거장이었고 하나님께서 소명자로 부름을 충실하 감당한 영적인 거인 입니다. 지금 모세의 그 사명이 마무리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 직전 입니다.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감회가 새롭겠습니까? 얼마나 그리워했던 땅이며 얼마나 사모했던 땅이며 모든 어려움과 모두 힘든 것을 이때를 위해 참았는데….하나님께서 모세는 못 간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 들어갈 수 없다 딱 잘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게 모세에게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못 들어간다는 게 너무 아쉬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25절 말씀에서 다시한번 간청하는 겁니다. 주님 제가 여기 오려고 미디안 광야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을 걸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저를 그렇게 사용하셨고 그 약속의 땅 들어가는 그 꿈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땅 들어가 밟고 죽게 해주세요. 그 아름다운 가나안 땅 들어가 한번 밟고 죽게 해주세요….정말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넌 절대 못 간다는 겁니다. 다시는 얘기 꺼내지도 말고 여기 까지가 너의 몫이니 그런 줄 알어…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광야 생활 할 때의 므리바 사건 때문입니다. 감정이 갑자기 주도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의지 했고 지팡이를 의지하는 실수를 했죠. 그게 물론 큰 잘못이긴 하지만 40년을 광야에서 리더로 목숨 걸고 살았는데 그 정도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정도 가지고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간다도 하시면 그 조건의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나님은 좀 너무 하셨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또 오늘 말씀을 통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는 이유를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라고 증언합니다. 다시 말하면 광야 1 세대가 불순종한 것에 대해 지도자인 모세에게도 책임을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에 대해서 지도자로서 책임이 있어서,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좀 영적인 의미이기도 한데요.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가나안 땅은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을 보여주는 미래적인 사건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결국 율법을 가지고는 인간은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큰 영적 진리를 보여주시기 위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율법이 아닌 복음을 가지서만, 그 약속의 땅 가나안, 그 약속의 땅 천국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질적으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 리더는 세워지지 않는 데 있습니다. 결국 모세가 여기서 멈추고 죽어야 지도력을 이양해야 광야 2세대는 가나안 땅에 가서 새로운 리더십과 함께 새 출발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라는 젊은 차세대 리더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세는 거기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멈추라…. 그럴 때까지 멈추고 다른 사람에게 바톤을 줘야만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바로 설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더 해야 될 것 같고 내 생각 있는 더 내가 있어야 될 거 같고, 내 생각에는 그 쪽으로 나아가야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이 그만해도 족하다… 그러면 멈출 수 있는 순종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자꾸 끝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시작을 잘하고 신실하게 주님 앞에 쓰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 중요한 것은 끝까지 신실하게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잘 마치는 것 또한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니 솔직히 끝까지 잘 마치는 게 훨씬 더 힘든 지 모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큰 그림을 바라보며 내 인생이 끝까지 주님 앞에 신실하며 끝까지 주님을 붙들고 내 인생이 끝이 잘 매듭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며 나아가는 자가 되기를 사모하시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먼저 받은 자, 많이 받은 자가 선봉에 서라. "
신 3,12-22 | 06-05-2020
여러분들 처음 차를 사셨던 기억 나십니까? 아니면 첫 집을 샀던 그 감동의 시간을 기억하십니까? 그냥 차가 아니라 첫차, 그냥 집이 아니라 첫 집을 샀을 때 그 느낌이란 남다른 감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처음이 주는 뭉클한 마음이 우리에겐 다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430년 노예 생활, 그리고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가운데 한 번도 자기 소유의 땅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오늘 말씀에서 요단강 동편에 땅을 얻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승리로 땅을 처음으로 얻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회가 얼마나 남달랐을까요. 아마 이제는 긴 터널이 지나고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이제는 40년의 광야 생활이 끝이 나는구나…라는 느낌을 가졌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셔서 우리 힘으로 절대 싸워 이길 수 없는 그 놀라운 승리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분위기가 하늘로 올라 갔을 겁니다. 처음으로 받은 땅을 보고 그들은 이제 앞으로 돌진하자며 분위기가 하나로 막 뭉쳐 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콜라 김빠지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몇 지파가가나안 땅에 가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여기에 그냥 남겠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19절 말씀을 통해 알수 있는데 그들에게 가축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얻은 요단 동편의 땅이 목축을 하게 굉장히 좋았던 땅인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안건너 갈테니 여기를 먼저 우리에게 달라고 이야기 한 겁니다. 지금 모두가 목숨걸고 요단강을 건너 싸우러 가는데,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믿음으로 인생을 던지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본인들은 그냥 여기에 주저 앉겠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로 인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맥빠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낙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공동체의 분위기를 흐르게 만드는 일이었다는 것이죠.
이런 요구에 대해 모세는 그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줍니다. 당근은 무엇인가 하면 18절 말씀과 같이 그들에게 기업을 허락합니다. 너희가 원하는 대로 이 요단강 동편에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는 겁니다. 대신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뭐냐면 너희의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라는 겁니다. 인간이란 들어올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다음 다릅니다. 군대를 면제 받기 전과 면제 받은 후에 사람의 마음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땅을 먼저 받았음으로, 뒤로 빠지는게 아니라 더 앞에 나가 선봉장으로 전쟁에 임하는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전쟁에 선봉장으로 앞장서야 하는 이유는 너희가 먼저 복을 받은 자이자 많이 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먼저 받은 자로, 많이 받은 자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앞장 서야 하고 선봉에 서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믿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소속된 주님의 백성들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자들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먼저 받은 자들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비하면 저희는 먼저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먼저 복받은 자로서, 많이 복받은 자로서, 앞장서고 선봉에 서서 나아가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사명과 영적 전투 현장에 선봉에 앞장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먼저 받은 자이며 우리가 많이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을 많이 받은 자 먼저 구원받은 자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 것 만을 위해 목마르지 않는 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의해 목마른 자, 이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해 내가 부름 받은 자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나만 구원 받은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주님의 사랑이 전해지며 영적 전투와 사명의 선봉에 서서 달려가는 자로 부름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께 먼저 받은 자이고 내가 하나님께 정말 많이 받은 자라고, 정말 믿고 고백한다면 것을 망각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과 소명의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 한번 깊게 고민하며 주님 앞에 달음질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선봉 서서 앞장서는 은혜를 깊이 마음에 담고 세상에서 두려움에 압도 당하지 않으며 여호와께서 친히 나를 위해 싸우시는 그 은혜를 붙들고 이 세상의 영적 전투와 사명의 현장에 선봉에 서십시요. 그것을 통해 주님이 함께하시면 누리며 나를 통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 놀라운 꿈을 꾸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하나님을 절대 신뢰해야 절대 열세에서 이길 수 있다."
신 3,1-11 | 06-04-2020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바산 왕 옥과 전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바산왕 옥이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와 싸우려 나왔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을 봤을 때 싸움을 먼저 걸 만큼 만만해 보였다는 것이죠. 약자가 먼저 싸움을 걸거나, 전쟁을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겉으로 봤을 때 객관적인 전력으로 봤을 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만만하게 보이니까 전쟁을 걸어온 겁니다. 오늘 말씀을 너무 생각없이 있거나 환경과 주변 상황을 보지 않고 읽으면 그냥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구나…그러고 넘어갈 수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상대편에서 먼저 공격을 해오고 전쟁을 걸어 올 정도로 절대적 열세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열세였는가 하면5절의 “그 모든 성읍이 높은 성벽으로 둘러 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하며.” 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높은 성벽과 견고한 성은 이스라엘 백성의 힘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상대는 비교할 수 없게 강했고, 그 성이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11절 말씀을 보면 바산왕 옥의 침대가 철 침상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바산 왕 옥과 군대는 철제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는 기본적으로 급이 다르고 이건 무기의 질에서 싸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객관적 전력으로는 비교 불가했습니다. 이것은 백전백패 나 마찬가지라는 그런 두려움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악조건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한 적군이 먼저 전쟁을 걸어오니 당연히 두려워지고 위축되고 거기에 압도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전쟁에서 두려움에 압도당하면 기선제압에 지는 것이고 결국 전쟁도 지는 것입니다. 싸우기 전에 이미 마음으로 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광야 1세대가 바로 그 성곽과 사람들에게 압도 당하며 두려워해서 싸우기를 거절하고 무너진 것이죠. 다시 한번 가나안 땅 앞에선 광야 2세대 이들을 향하여 똑같은 실수 반복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상황을 보고 높은 성벽을 보고 그들의 놀라운 기세를 보고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명령하십니다. 안심하라는 것이죠.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보지 말고 철제 무기를 보지 말고 그들의 높은 성벽과 환경에 압도당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랍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 전쟁의 나갔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고 철기 문화의 그 무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향하여 돌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물맷돌만 들고 돌진하는 것과 같은 위험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훈련에 그들은 인생을 맡기고 절대적 열세인 그 전쟁에 참가한 겁니다. 환경과 상황을 압도 당할 수 밖에 없는 그 악조건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의 대장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놀라운 그 믿음 싸움을 신앙 생활을 그들은 전쟁을 통해 하게 된 것이죠. 그 결과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며 승리를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심을 그들이 경험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걸 경험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 훈련은 두려움을 벗어난 훈련이자 상황과 환경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안에서 승리를 경험하는 훈련이었습니다. 상황에 압도되지 않고 아니하고 두려움 대신 안심하는 훈련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신앙이 성숙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이었고, 그 가나안 땅에 전쟁들을 통해 배우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바산왕 옥과의 전쟁에서 승리가 얼마나 중요 했으면 역사적으로 잊지 못해서 시편 136 편을 통해 이 전쟁에 대한 감사가 나옵니다.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들은 자자 손손 잊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마음에 새기며 감사하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찬양하며 시편 136편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계속 반복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우리가 처한 모든 문제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산 왕 옥과 싸우는 그런 상황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환경을 바라보면 압도 당하지 않을 게 없습니다. 내가 없는 철제 무기들이고, 성벽은 높고 적은 나보다 훨씬 강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워할 거 투성입니다. 상황에 두려워하지 말고 압도 당하지 말고 이 시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바라보라는 것이죠.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과 믿음 생활이라는 것은 나의 힘과 조건을 훨씬 뛰어넘는 그 환경에 압도 당하며 시선이 머물어 있는 것을 하나님에게로 옮겨가 안심하며 하나님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고 안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우리에 앞서 가시는 그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며 안심하고 이기는 습관이 몸에 배는 훈련입니다. 여러분들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두려움을 이기는, 적을 이기는 이 놀라운 습관이 경험 되어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며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그 놀라운 승리가 여러분들 삶 가운데 경험 되야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바라보십시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안심하라” 는 말씀을 듣고 동요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믿음을 붙들고 앞으로 향해 나아가십시오…그 것이 바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믿음 생활이고 절대 열세를 넘어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새벽묵상 "내 삶속에서 일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고백하라"
신 2, 26-37 | 06-03-2020
모세는 신명기를 통해 광야 1세대가 불순종하고 무너지는 것을 회고하며 광야 2세대는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그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했던 하나님, 우리를 위해 친히 싸우시고 우리 앞서 가지고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고백을 구체적으로 체험한 과거 사건을 모세가 회고합니다. 이 회고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붙들고 그 고백의 능력이 힘이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 가야 한다는 모세의 간절한 마음을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됩니다. 먼저 오늘 말씀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인 “우리 하나님 여호와” 를 깊이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29절, 33절, 36절, 37절에서 반복적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가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 놀라운 일에 대한 고백의 사건이 오늘 말씀인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냥 이겼다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루신 사건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약속의 땅을 받게 되는 비결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붙들고 고백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모세는 지금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내 삶에 있어 주어가 되는게 대부분 my…I me….mine다 이런 것들입니다. 자신이 주어가 되어 주도하고 내 중심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게 쉽고 당연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 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삶의 주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그 승리를 바라볼때 하나님이 주도 하시고 이끄셔서 주신 승리임을 바라보고 고백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끄시고 하나님이 내 삶의 주어 되시는 삶을 고백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오늘 모세가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고백인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먼저 가 싸우시고 먼저 품어 주셔서 승리하게 되는 이야기의 구체적 예가 등장합니다. 바로 헤스본 왕 시혼과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2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화의 말을 전하며 전혀 싸울 의사가 없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쓸데 없이 다투지 말라는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도 성도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평화를 말하고 평화의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이 되기 원하시며 특별히 부러워하지 않고 불평의 말을 하지 않는 성도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늘 나의 있어서 먼저 평화의 말과 사랑하는 말이 앞서 나오는 그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의 싸움은 나만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내가 평화를 원한다고 해서, 내가 평화의 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거 아닙니다. 상대가 일방적으로 나를 공격하고 나에게 먼저 들어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평화롭게 그냥 지나가려 그랬고 분란을 만들지 않으려 했는데 헤스본 왕 시혼이 평화의 말을 거절하고 무기를 가지고 와서 먼저 공격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고 하나님이 앞서 가시며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이 전쟁을 통해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한주간 무엇을 하셨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상황과 환경, 그리고 결과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고 고백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그것을 고백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라는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시간 나를 이끄시고 인도 하시는 그 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반복적인 고백…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중심되는 그 삶을 체험하며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깊은 신앙을 갖는 삶이라는 것이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에 대한 분명한 고백 없이는 가나안 땅 정복 을 앞에 두고 전쟁이 계속되는 비상 상황 가운데 그들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승리를 주시는 분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되시고 주인되신 하나님을 붙들고 실제로 믿는 거 외에는 없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도 오직 우리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 되셔서 나를 든든히 붙들어 주시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붙드시고 저와 여러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구체적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통해 간증 되는 많은 이야기들이 고객들이 여러분들 삶에 넘쳐나 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만 마음에 품으라."
신 2,1-25 | 06-02-2020
신명기 2장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보낸 해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광야 생활 가운데 특별히 두 가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강조합니다. 첫 번째는 광야 생활에서 그들이 고백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 였던가…입니다. 7절 말씀에서 40년의 광야 생활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40년 동안 광야를 두루 다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떠나지 않고 언제나 함께하심…. 이것이 모세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사십 년 동안 그냥 함께 하신 것 정도가 아니라 저번 주에 배웠듯이 이스라엘 백성 보다 먼저 가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에 안아 보호해 주시며 그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회상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루하루에 상황을 힘들고 어렵고 주변이 척박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광야에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지나고 보니 하나님과 가까이 만나고 동행했던 그 시간이 은혜의 시간 이었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 땅에서 삶은 광야 생활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부족함이 어떻게 없을 수 있습니까? 어려움과 환경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뒤돌아 봤을 때 이 광야 생활을 이기게 하는 그 힘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있었음을 우리도 믿음으로 고백하고 선언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뒤돌아 봤을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기에 그분의 은혜로 인해 내가 부족함이 없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복되고 감사한 인생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두번째로 모세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만 마음에 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기업으로 주신 곳은 너희가 올라가며 이길 거고 내가 더 여 함께 하고 내가 너희를 승리하게 인도하니 걱정 말고 올라가고 앞으로 돌진 이라고 말씀 하셨지만, 반대로 기업으로 주지 않은 데는 마음두지 말고 눈도 돌리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몇 군데 계속 반복되는 게 바로 이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라는 말씀입니다. 약속으로 주신 땅에 들어가 싸워서 이겨 차지하게 될 기업 외에는 눈 돌리지 말라는 겁니다. 절대 싸우지 말고 마음에 품지 말고 거기는 그냥 통과 하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누리는 놀라운 은혜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에만 마음을 두고 취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다다익선을 가르치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빼앗더라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법만 어기지 않고, 혹은 법을 적절하게 이용해서라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다….뭐든지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지는게 이 세상에서 좋은 인생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속담같이 남의 것에 기웃 거리는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합니다. 기업으로 주지 않은 곳은 눈으로 보기에 좋아 저기를 차지하고 싶다….저게 있었으면 꼭 좋겠다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기업으로 선물로 주신 것만 취하라는 것입니다. 기업으로 받지 않은 데는 마음이 끌리고 마음이 흔들려도 지체하지 말고 그냥 통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기업에 관심 가지는 것이 불순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탐내지 말라 십계명에서도 명령하신 겁니다. 나에게 주신 기업에만 신경쓰고 관심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기업 같은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습니다. 내 남편에게만 내 아내에게만 관심 기울이고 다른 기업에 기웃거리지 않는 게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남자,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여자에게 기웃거리는게 무너지는 첩경이 라는 것이죠. 그래서 주시지 않은 것에는 마음두지 않고 관심 갖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만 신경 쓰는 것 이것이 바로 광야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원리이자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원리입니다. 기업으로 주시지 않은 것은 마음도 눈도 돌리지 않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의 있기를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있는 사람이다. "
신명기 1,19-33 | 05-29-2020
오늘 말씀은 신명기의 큰 주제인 중요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11일이면 가는 길을 40년 동안 방황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 40년을 허비하고 낭비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이었다는 것을 모세의 설교 형식을 빌려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불순종의 예로 가나안 땅 앞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게 되었던 사건을 구체적으로 복기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이제 들어가지 못하고 이 광야 2세를 놔두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그 마음은 걱정이 많이 되겠죠. 그래서 이들에게 남기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말을 간절한 마음에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 세대의 과거 실패를 차근차근 복기하면서 다시는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군대라는 것은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약속에 땅 가나안 앞에서 나만 믿고 따르며 “돌격 앞으로!”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자 명령인 “돌격 앞으로..” 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지 않고 불순종합니다. 가나안 땅은 정말 좋은 땅이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인들이고 하늘까지 닿은 성곽을 바라보며 압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반대로 불순종하며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탐꾼들의 보고를 성경은 약속의 땅을 폄하하는 “악평”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들의 보고는 사실에 근거한게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에 압도당한 눈으로 바라본 과장이었습니다. 두려움에 압도 당하면 상황과 환경을 반드시 압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림자 같이 크게 보이는 것을 실상이라고 착각하는 거죠. 그런 보고를 들으며 백성들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오냐 하면 원망과 낙심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복이 갑자기 원망 거리 로 전락한 겁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하찮게 여겨지는 것을 넘어 “우리를 미워하여서 여기서 죽게 하려고” 쓸데 없는 일을 하신 탄식거리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며 불순종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다시 한번 증언합니다. 30-31절의 모세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닫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누구신지 진짜 모르냐? 너희 보다 먼저 가시고 너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31절 말씀은 더 마음에 와 닿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아들을 안듯이 그들을 “꼭 안으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들이다….그러니까 안심하라 말씀 한 겁니다. 여러분 광야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말한 성경이 없는 것 같아요. 아들을 안으시는 것처럼 나를 꼭 안으시는 하나님…그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안으시는 품으로 저와 여러분들은 이 자리까지 온 겁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나를 않으시는 그 품을 느끼십니까? 그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품고 보호하심을 여러분들은 체험하십니까? 그러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야… 나는 하나님의 품에 보호받는 사람이야…. 이 믿음이 분명하면 광야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안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모세가 믿고 확신하는 하나님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이끌고 오신 하나님을 너희도 분명히 믿고 고백하라 권면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세와 같이 이 하나님을 고백할 때 우리에게 능력이 있고 우리에겐 안심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거역한 본질은 무엇입니까? 광야 1세대의 실패는 이 하나님의 안으시는 품을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들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인도 하시고 보호하심을 믿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복기하며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아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에 압도당하고 과장된 그림자에 낙심하고 원망하는 인생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할 수 있는 자가 되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꼭 안아 주시는 사람임을 믿으십시오. 우리에겐 환경이 거대하게 보이고 그림자와 같이 크게 보이며 우리를 벌벌 떨게 만드는 광야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지만 우리는 안심하는 기적을 누리십시오. 나를 위해 먼저 가시며 나를 위해 싸우시는 그 하나님의 품 안에 있기에 안심하라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의탁 하십시오. 그것이 광야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믿음을 붙드는 신앙 생활입니다.



​새벽묵상 "계명은 나에게 족쇄가 아니라 축복의 도구다,"
신 1,9-18 | 05-28-202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복 주시기 원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 주시기 원하는 마음이 너희가 복받고 싶은 마음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기 원했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은 10배 100배 정도가 아니라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심을 강조했습니다. 이 말씀을 꼭 마음에 새기시면 좋겠습니다. 복도 그냥 부어 주시기 원하고, 여러분들이 받고 싶은 복의 간절함과는 비교가 안되게 더 하나님께서 주고 싶은 마음이 훨씬 크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확신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을 많이 주시기 원하시는데 그 복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주고 싶어하시는 복을 나는 그다지 사모하거나 원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앞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토록 부어주고 싶으셨던 복,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하나님이 주신 복이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주고 싶으신 마음을 가득담아 복이라고 주신 게 뭐냐면 율법이던 것입니다. 다른 복들을 기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굉장히 실망했을 수도 있어요.
신명기에서 이 계명과 율법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설명하고 다시한번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주고 싶으신 마음 가득담아 복이라며 신명기에서 계명과 율법을 다시 주셨는가 하면 그들이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은 영적으로 가만히 앉아 가지고 차지하는 땅이 아니라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시만 방심하면 그들이 땅은 빼앗을 지 모르나 정신과 마음은 가나안에 다 동화되어 영혼이 다 털리는 겁니다.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안 되는 영적인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 가나안 땅이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짜 복을 받기 원하는 데 그 복이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며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게 진짜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 계명과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추장한 것이나 족쇄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위한 도구 였고 생명과 복을 주시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라 광야1세대는 모두 불순종하고 40년 동안 방황하고 다 엎드려진 것이죠. 그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술을 통하여 다시 한번 강조 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에게 복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고 많아서 그 간절한 마음을 모아서 주는 게 계명과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붙들고 하나님 안에 있어야 가나안 땅에 치열한 영적 전투에서 너희가 승리하고 동화되지 않고 우상으로 무너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끝까지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에 보게 되면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광야로 가서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세 번의 모든 그 광야에서의 사단의 시험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시험을 이기기 위해 사용하신 성경 말씀이 바로 신명기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말씀을 인용해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우리에게는 사단을 물리치는 성령의 검과 같은 책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사단이 미혹과 유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 뜨리려 할때 이 신명기 말씀을 붙들고 이기는게 진짜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신명기의 정신을 붙들고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의 본질의 의미인 하나님의 축복을 위한 도구를 가지고 우리가 살아 간다면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며 성령의 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놀라운 그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기준을 주셨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라 불편하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 거칠고 저주와 타락의 기운과 에너지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내가 동화되지 않고 거기에 물들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끝까지 성도됨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이 나에게 축복을 위한 도구이며 생명과 복 주시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그 말씀 가운데 뿌리내리는 인생이 진짜 복된 인생이며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임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원하시는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믿으며 그 말씀 가운데 든든히 서 가며 뿌리 내리 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마음에 담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워 들으라"
신 1,1-8 | 05-27-2020
오늘부터 저희는 신명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아침 묵상하며 생명의 양식으로 공급받을 합니다. 오늘은 신명기 서론으로 큰 그림을 함께 잡으려고 합니다. 신명기는 모세오경 이라고 부르는 첫 다섯 권의 구약 중 마지막 책입니다. 신명기라는 말은 영어로 Deuteronomy라고 Deut(다시)와 Nomos (율법)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명기라는 책은 두번째로 주신/ 다시 주신 율법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두번 주셨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주신 말씀을 모세가 유언과 같이 광야 2 세대에게 다시 반복하며 풀어 설명하는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지금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에게 이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가 “요단 저쪽 맞은편”입니다. 즉 가나안 땅 들어가가 바로 직전인 거죠. 예전에 모세가 율법을 광야 1세대에서 가르칠 때는 장소가 시내산 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율법을 들었던 광야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40년 동안 모두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지금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죽음을 앞둔 노장 모세를 통해 율법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출애굽의 기억이 없고 광야 세대만 기억하는 2세대들입니다. 그러니까 내용상으로는 율법을 반복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듣는 대상이 다른 것입니다. 신명기를 통해 다시 반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유언과 같이 가르치는 이유는 1세대가 불순종해서 무너졌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금 광야 2 세대에게 가나안 땅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한번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풀어서 가르치고 설명하는 겁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꼭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고, 다시 한번 가나안 땅 들어가기 직전 모세가 정말 이렇게 해야만 너희가 살고 복 받는다는 것을 피를 통하는 심정으로 다시 가르친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전체를 흐르는 맥 같은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쉐마 이스라엘”….들으라 이스라엘이란 말입니다. 쉐마란 히브리 단어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에 담기 위해 듣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음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귀로 들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가가 핵심인 셈입니다. 마음에 담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워 들으라…그게 바로 쉐마 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 마음을 다해 들어가 이게 바로 쉐마 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이 말씀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계속해서 이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으로 듣는 귀가 있다면 모든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담아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축복받고 저주를 받게 되는 그 기준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쉐마…했는가 아닌가 입니다. 들어서 마음에 담아 마음으로 실천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서 그 하나님의 율법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결국 불순종하며 무너지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1-8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1세대, 그들의 큰 실패와 무너짐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1세대가 어떻게 인생과 시간을 낭비 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2절 말씀을 보면 호렙산 앞에서 가나안 입구까지는 걸어서 11일이면 도달하는 거리였습니다. 그렇게 간단하고 길지 않은 그 간단한 거리를 지금 어느 정도를 걸렸는가 하면 3절 말씀에 보면 40년째에 도착한 겁니다. 그렇게 열하루 길이면 들어가는 그 길을40 년 걸려서 도착했고, 그 사이 광야 1세대가 모두 죽은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이유였던 것이죠. 순종대신 불평과 원망, 낙담하는 불순종의 결과였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인생과 시간이 낭비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낭비에 대해서 별로 큰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돈낭비 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데 시간 낭비에 대해서 우리는 별로 경각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에서 봤을 때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을 사는데 그 시간을 낭비하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방탕한 인생이라고 지적할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십 년 동안에 광야에서 방황한 것은 개인적으로 시간낭비 정도가 아니라 200만명의 사람들의 공동체 전체의 낭비였고 공동체가 다 방탕한 겁니다. 광야 1세대는 불순종의 결과로 그들의 세월을 낭비한 삶, 그 삶을 방탕한 인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소유를 모두 허랑방탕하게 낭비하는 것 처럼 지금 이스라엘의 전체 공동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과 하나님이 허락하지 시간을 모두 허비하고 낭비한 겁니다. 불순종 때문에….
광야 2 세대에게 가르쳐주었던 모세의 유언과 같은 다시 가르치는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는 지금 이시간 우리에게도 다시 들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에 담아 잊어버리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이 조상들 같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실패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주권을 맡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공동체적으로 시간과 인생을 낭비하며 결국 광야 에서 다 죽을 수밖에 없었음을….한 번 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며 한번 지나간 인생은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이것이 바로 신명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새벽묵상 "사람 세우는 기준을 기도로부터 찾으라"
행 1,21-26 | 05-26-2020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가 위로부터 입혀지기 전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에 순종하며 그들이 모여 오직 기도에 힘썼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그들은 기도하며 온전이 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라는 의미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일어나 그 공동체가 풀어야 되는 문제, 털어내야 될 문제인 가롯유다 이야기를 꺼냅니다. 기도 가운데 베드로는 부끄러운 문제이자 털어내야 할 이 문제를 해결함을 나누고, 오늘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세울 마음을 주셨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공동체가 새로운 사람을 온전히 세움으로 새 출발하는 생각이 성령 하나님이 주신 생각으로 믿었다는 것이죠. 사실 그 11 제자들은 한 명을 채워 넣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게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그들이 스스로 예수님 앞에 실패하고 무너진 게 너무 많아서 그들 스스로 제자들을 부르거나 사도를 세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래서 그들은 11 사도로 그냥 있는 게 최선이다 생각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중에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그때까지 기도하는 이 시간을 통하여 12 사람으로 채워져야 시간이 차고 때가 차는 것, 하나님이 일이 임계점과 함께 끓어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기도하면서 새로운 사도 한 명을 세우는 일을 한 것입니다. 가롯유다의 공석을 채워 12사도로 다시 새 출발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로운 사도를 세우는 과정과 그 자격을 보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써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기준을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3가지 기준을 우리에게 가르치는데 첫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입니다. 22절에 등장하는데,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일꾼이 되며 헌신자가 된다는 것은, 일하는 자가 되기 전 우선 주님을 가까이 알고 주님과 가까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제와 같은 데오빌로, 즉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가까이 아는자가 되는 게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꾼이 되는 게 아니라 먼저 예배자가 되고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순종하는 자가 되며 주님의 사랑에 단단히 매여 말씀으로 풍성한 공급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동행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삶의 자양분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나의 일상에 주님과 가까이에 만나며 주님이 함께 하심이 나에게 여러가지 사건을 통해 경험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게 주일 와서 예배 드리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내가 잘 아는 몇 사람 만나고 그냥 가는 그런 종교적인 익숙함이 내 신앙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며 그 분을 따른다는 것은 내 인생에 주님이 함께하심을 일상에서, 때로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린 항상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나에게 가장 큰 힘과 능력이 되고 항상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통해 내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 예수님이 나를 이끄심을, 인도하심을 믿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계획된 사건이 아니라 때로는 뜻밖의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통해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누리고 경험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것이죠.
두번째로 제자의 조건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 삶에는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믿음의 대상인 내가 믿고 주인으로 고백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과 그것을 증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갈급하고 말씀을 온몸으로 먹는 사람들, 그래서 부활할 증거하며 부활을 증인으로 살아가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며 증인이 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건 부활 하신 예수님을 내가 구체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말씀을 통해 만나기도 하고 환경을 통해, 혹은 구체적 사건을 통해 만나 주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말씀을 통해 상황을 통해 어떤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진짜 만나야 여러분들이 부활 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되고 내가 그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그런 능력과 간증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 시며 그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만나 주셨으며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이끌고 가시는가에 대해 내 삶으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전도 아니겠습니까?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증거 할 것이 있으며 나눌 것이 있는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제자의 조건은 “우리와 더불어” 사역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혼자 뛰는 자가 아니라 혼자 신앙생활 하는 자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일하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역하는데 있어 동역이 어려운 사람들, 혼자만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찾으시는 제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더불어 함께 부활을 증언하며, 증언하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 써 예수님을 온전한 머리로 주인이심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혼자 뛰는 게 아니라 함께 더불어 일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높아진 사람은 좀 낮춰주고, 들어간 사람은 좀 세워주고 그래서 함께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 사명을 함께 감당하는 그 기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혼자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예배 드리며 혼자 신앙생활 하는게 아니라 더불어 신앙생활 하며 혼자 사역하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사역하는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찾으셨던 제자이며 그게 교회의 공동체의 신비인 것입니다. 함께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히 전해지는 것이 제자의 조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세우는 기준, 제자를 세우는 기준을 기도로부터 찾으며 말씀으로부터 찾는 그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 부활의 증인되는 사람, 더불어 동역하는 사람…이 세가지를 잘 묵상하며 이런 제자들이 왕성하게 우리 교회를 통하여 재생산되는 은혜가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기도하면 매듭짓고 털어내야 할 것이 생각난다."
행 1,15-20 | 05-23-2020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성령의 권능을 입기 전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마음으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것이 그들이 예수님의 기다리라는 명령을 순종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냥 멍하니 손 놓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방법이 바로 오로지 기도하고 몰입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것을 통해 사도행전 2장의 놀라운 역사가 하나님의 때가 이르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기다리며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에서 그 중에 대표격인 베드로가 일어나서 놀라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도 중에 베드로가 일어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주제가 무엇인가 하면 가롯 유다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실 베드로를 포함한 11제자들에게는 가롯유다 문제가 굉장히 꺼내기 싫은 부끄러운 부분입니다. 그냥 이것은 과거로 덮어놓고 그냥 저 구석이 밀었다가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의 모습이죠. 유다 얘기를 입 밖에 내는 순간 아픔과 부끄러움을 다 열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모두 기도로 준비하라고 경고 하셨는데 기도로 준비 하지 않고 영적인 나태함 에 빠졌다가 다 무너졌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배반했고요, 막상 예수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붙잡히시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 했고요. 나머지 제자들도 다 숨어 버렸습니다. 입 밖에 내고 싶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가롯유다의 배신은 상처를 넘어 그냥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배반한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인생을 마감한
가롯유다 문제는 그냥 입밖에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슨 확신을 주신 것인가 하면 이 사도 공동체가 권능을 위로부터 받기 위해 이 유다 문제를 마무리 져야 한다 라는 것이죠. 이것을 성령 하나님이 꺼내게 하신 겁니다. 이것을 해결하고 나아가야 이 공동체가 영적으로 쭉쭉 뻗어 나가는 데 이것이 해결되지 않아 엉겅퀴와 같이 가시덤불과 같이 걸려 넘어지기 하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쭉쭉 빨아 먹는 것이 있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거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지금 이 120명의 사람들 앞에 너무나 부끄러운 과거 이야기, 그들의 상처과 부끄러움인 유다의 배신과 무너짐의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가 가롯 유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굉장히 영적인데, 그 이유는 유다의 배신과 파멸에 문제를 개인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해석 가운데 가져와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따르면 가롯유다가 그렇게 예수님을 배신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시편 말씀에 고백과 맞다 있다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시편 41편 9절을 인용하며 가롯 유다가 예수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되어 배신한 것은 시편 말씀을 통해 다해 입으로 고백 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자기 직분을 버리고 떠난 것이 다윗이 시편 에서 고백한 원수의 일이라는 거죠. 원수가 대적하고 원수 발꿈치를 들은….시편에서 다윗이 탄식하며 고백하는 원수들은 다윗의 개인적인 원수 되지만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신약의 관점에서 해석되는 시편은 뭐냐면 그 원수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 입니다. 시편에 증언되는 다윗이 고백하는 원수들은 바로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는 원수 이자 하나님께 완전히 심판 받아야 되는 사단 마귀의 하수 로서의 원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 있어서 지금 이 말씀에서 시편을 인용해 가롯 유다를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의 표본으로 등장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유다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오늘 유다가 죽은 것을 8절 말씀에는 어떻게 표현 했냐는가 하면 “ 몸이 곤두박질 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고 했습니다. 아주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인데 여기서 이해가 안가는건 유다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스스로 목매 죽은 자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는가….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냐면 가름 유다가 목을 매고 스스로 죽었는데 목의 줄이 떨어질 때까지 그 어느도 그 유다의 시신을 거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놓아둔 거에요. 어느 때까지 방치 있냐면 그 유다의 목에 걸려있는 줄이 끊어져 그의 시신이 땅으로 곤두박질 할 때까지….그렇게 곤두박질 하면서 급에서 터져나온 흘러나온 틈 창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라는 것이죠. 그렇게 가룟 유다 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해 있는지를 지금 베드로는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때 영광스럽게 주님의 제자였던 갈은 주다 인생이 처참하게 막을 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유다라는 인간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저주 받은 인간의 대명사로 추락해 버린 겁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증언함으로서 지금 120명의 모인 그 기도 공동체가 유다라는 짐을 해결하고 매듭지으며 마음으로 기도함을 통해 과거의 죄를 완전히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영적 리더이자 수제자인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기도가 깊어지고 기도에 올인 하게 되면 우리가 문제를 매듭 짚고 넘어서야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심을 마음에 깨닫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공동체 안에 해결될 문제, 이 문제가 매듭 찌고 털어내야 되 것들이 발견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것이 부끄럽고 저 카페트 밑에 숨겨 놓고 절대 꺼내고 싶지 않은 건데 그 문제가 매듭 치고 털어내야 예수님이 그 공동체를 성령 하나님이 공동체를 놀랍게 사용하신다는 것이죠. 개인에게도 매듭지어 지고 털어야 되는 문제가 있고요. 교회 공동체도 매듭짓고 털어내야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를 사로잡는 거와 같이 뭔가 평안이 없고요. 그 가운데 깊은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분주한 가운데는 잘 발견되지 않고 그냥 모르고 살아가는데, 이렇게 오로지 기도하며 내가 멈추고 기다리게 되면 예수님이 그걸 떠오르게 하시는 겁니다. 마음의 부담을 주시는 겁니다… 이거 해결해야 한다 라는 것이지요.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서 기도함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부담이 뭡니까? 그 부담과 불편함은 지금 순종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고 매듭 찌르고 하시는 주님의 싸인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게 되면 다음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은혜에 통로가 된다는 것이죠. 부끄러움과 죄를 완전히 끝내고 해결하고 정리하는 것을 통해 성결한 공동체로 성령 하나님의 임재 거룩한 영의 임재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했던 놀라운 일입니다.




새벽묵상 "기다리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다"
행 1,9-14 | 05-22-2020
오늘 사도행전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히 이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께 들어올려 돌아가시는 그 승천의 날이죠.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강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순절과 예수님의 고난, 부활과 비교했을 때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강조는 매우 약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교회력으로 봤을때 예수님의 승천 일이 사실 어제, 5월 21일이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은 돌아우는 주일을 승천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사건을 우리에게 현장감 있게 증언하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시는데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9절 말씀에 증언합니다. 여기서 구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눈에 보이는 구름으로만 생각하시면 안되고 하나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임재의 표현이 바로 구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놀라우신 임재 가운데 예수님이 들려 올라가신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께 승천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내가 죽어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분명한 확신과 꿈입니다. 또한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꿈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과 첫사랑을 경험하고 사명을 받은 성도로서 이 분명한 꿈과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서 시간이 다하고 죽으면 그냥 끝인 인생이 아니라,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께, 아버지 집에 돌아가는 그 꿈을 분명히 믿고 것입니까? 나는 그냥 죽는 인생이 아니라 사라지는 인생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생이라는 이 분명한 고백과 꿈이 있을때 눈 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운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곳에 올라가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그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겁니다. 이 소망과 꿈 때문에 현재 내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같이 현재 내가 겪는 수많은 고난들은 장차 내가 볼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승천하신 이후 그 제자들이 어떻게 나머지 시간을 보냈는가? 13절을 보니까 그들은 모두 마가의 다락방으로 모였습니다. 그 다락방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11 제자들과 더불어 여인들도 등장하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이 바로 “기다림”이라는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너희 힘으로 뛰지 말고 먼저 기다리라. 성령 하나님이 위로부터 권능을 너에게 옷입혀 주시기 전까지 너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이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기다림이란 아무것도 안하고 넋놓고 있는 기다림이 아니라, 기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이란 기도하는 시간이라는 걸 안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명령하신 것은 그 시간 동안 충분히 기도하라는 것을 그들이 드디어 깨닫게 된거죠. 그래서 오로지 기도에 힘쓰면서, 다락방에 오로지 기도하기 위해 모였고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마음이 갈라지지 않도록 한마음으로 힘써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기다리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몰입하는 기도를 드린 거예요. 한두시간 기도하고 만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은 오순절 까지 열흘 동안 오직 한 마음으로 끈질기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을 놓고 그렇게 몰입하며 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을까요? 건강과 사업을 위해 기도했겠습니까? 자녀문제 놓고 기도했겠습니까? 약속하신 것,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시옵소서!...그거 하나 아니었겠습니까? 오로지 하나의 기도제목 “약속하신 권능이 임하면서 증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렸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하는 기도였으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바로 주기도문의 그 핵심의 기도를 그들을 한 마음으로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깨지고 무너지고 저주의 기운을 받아 사는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걸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재의 고난의 주저앉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이 분명한 꿈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지금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함께 예배 드릴 수 없는 시간이 두달이 되어갑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 가운데 우린 계속 기다릴 수 밖에 없죠. 그때 우리는 그냥 넋 놓고 앉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도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되고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시간이 되면 나중에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폭발적인 역사가 있다는 것이죠. 기도를 하긴 하는데 우리는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서툽니다. 우리는 기도하는데 오랜 시간 끈질기게 몰입해서 기도하는데 서툽니다. 내 원하는 것만 내 뜻을 따라 구하는 기도에만 익숙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기다림의 기도를 하는 시간 되기 원합니다. 그게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되는 영적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다림이란 하나님 일을 바라보며 오로지 기도의 힘 쓰는 시간이 됐을 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놀라운 일을 시작하심을 믿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시간이 나를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변화시는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오직 성령이 임해야 내 나라와 내 뜻이 포기된다."
행 1,6-8 | 05-21-2020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어떻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이끄시는가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 기초해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재교육을 시켜 주셨습니다. 40일 동안 예수님을 통해 특별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에서 굉장히 실망스러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정말 마지막으로 한두 마디 더 할 수 있는 때가 지금 이 상황인데 그 마지막에 제자들이 뭘 물어 보는가….정말 만두속 터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꼭 묻고 싶었던 그 한마디의 질문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지금 시켜 주실 겁니까” 라는 겁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 옷을 붙들고 지금 이 순간이 이스라엘 나라 독립시켜주실 때입니까….물을 겁니다. 정말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그 질문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냐면,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사도들을 보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하는 것이 즉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 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본인들이 꿈꾸는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이 회복되는 것을 위해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랐으며, 예수님이 능력자 같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놀라운 힘과 권력으로 로마 군인들을 다 무찌를 것을 기대하며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면 그들은 좌의정을 하고 싶어 했으며 우의정을 하고 싶어 했으며 그 권력의 실세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며 예수님께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대와 달리 너무나 연약하고도 힘없이 십자가에 그냥 못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너무 실망스럽고 마음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40일 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쳐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내나라와 내 뜻으로 포장된 그들만의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지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한 모습이자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도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할 내이름, 내나라, 내 뜻을 포기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승천하시는 현장에서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하는 사도들을 바라보며 정말 끈질기게 하나님 나라로 포장된 자기가 생각하고 꿈꾸는 나라를 포기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말하며 천국을 말하며 구원을 말하지만 우리가 진정 마음에 두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 내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 한다 얘기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가지고 그들이 정의하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자신만의 나라의 해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 나라는 내가 꿈꾸는 구원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고 증언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이 진짜 라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때는 너희가 알바 아니라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너희가 생각하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일이란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되고 그 압제에서 벗어나는 그런 회복 정도가 아니라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아 온 인류가 그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 주시는 자들의 마음속에 유대인이라는 그 담장을 넘어 온 인류의 백성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세워지는 그 놀라움이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모든 열방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 받는 그 권세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천국 백성 되는 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죠.
승천하시는 직전까지 여전히 자신들이 생각하는 날, 내 나라와 내 뜻을 포장된 하나님 나라를 포기 못하는 그 제자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는 1장 8절 말씀을 정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씀 하셨을 것 같아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결국 그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이 바뀌는 것도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하면, 하늘로부터 성령 하나님이 너희에게 임하면…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너희가 생각하는 바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 시키신 다는 말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위해 열심히 뛴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의 대상과 그들이 꿈꾸는 나라가 이제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로 완전히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제자들과 같이 우리는 여전히 내 나라에만 관심이 많으며 여전히 내 나라가 잘 되는 것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자들이며 그것을 위해 강력한 힘과 권능을 사모하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모든 것이 무엇을 통해 끊어지는가 하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포기하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나에게 임하시면 성령 하나님이 내 생각과 가치관을, 특별히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일의 개념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 내 뜻으로 포장된 지금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모든게 바뀐다는 것이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바로 굉장한 폭발력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발력이 일어나 다 내려놓고 포기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일과 회개의 복음으로 돌아와 십자가 은혜를 붙들고 땅끝까지 전해지도록 부름받은 증인입니다. 증인으로 우리는 내나라와 내뜻, 내 주장과 생각을 관철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전하라 하신 것만을 증거 하는고, 성령이 말하게 하신 것만 전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새벽묵상 "내 마음과 관심이 온통 어디에 쏠려 있는가? "
행 1,3-5 | 05-20-2020
저희는 3월 중순부터 계속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자택 격리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어려움이 사순절에서 시작해 부활절을 지나 오순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일이 왜 일어났는가 한탄하며 어려워 하며 그냥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간 사도행전을 통하여 우리는 오순절에 주셨던 성령 하나님의 강림을 기다리며 기대하며 은혜가 흘러넘치며 채워지는 시간으로 웅크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행전은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어떻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시고 이끄시는지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어떻게 나를 일하시며 이끄시는지를 바라보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가운데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까지 의도적으로 집중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셨는데 그 함께하시는 시간동안 집중하신 두 가지가 있었음을 오늘 말씀은 증언합니다. 첫번째로 부활의 확실한 증거들을 친히 보이셨습니다. 주님이 세우신 사도들이 전할 복음의 핵심은 Christ is risen! 예수 부활하셨다는 메세지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살아 계심을 확실성으로서 여러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다시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생애 내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 하셨고, 구약에서 드러나는 장차오실 메시야의 약속이 나를 통해 이루어짐을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그렇게 강조하셨지만, 제자들은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적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내려 오실 보혜사 성령으로 태어날 주님의 몸인 교회의 탄생, 즉 하나님의 나라에 일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드러날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며 온 세상에 확산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일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세상의 일에, 세상 나라에 관심 갖지 말고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 나라의 일에 너희의 마음과 신경을 다 쓰고 관심을 두며 살아가는 삶을 살라는 것을 말씀 하신 거죠.
온통 하나님의 일에 마음과 관심이 쏠리게 될때 해야할 첫번째가 무엇인가? 제일 먼저해야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뛰는 게 아니라 기다리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때가 올때까지 잠잠히 웅크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일 안하고 멈추는 수동적인 멈춤이 아니라 팽이가 계속 움직이지 않고 돌듯이 약속하신 것을 주실 때까지 내 모든 것을 집중해서 떠나지 않고 머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채우며 내 마음을 주님의 은혜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해 실수 하고 어려움을 겪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일도 내 개인의 일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해 어려움을 당하는 수많은 일들이 성경에도 나오고 우리 삶 가운데 도 등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도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제자로 우리가 살아갈 때 제일 먼저 기다리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코로나 를 통하여 모든 것이 멈추고 나니 이 세상 일에 관한 것들이 얼마나 비본질적이며 무의미하고 우리에게 없어도 죽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절감합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때 우리는 온통 내 마음과 관심을 하나님 나라에 두며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쏟는 이 기도의 열정과 놀라운 은혜를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언제까지 기다리라 그러셨는가 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까지… 즉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으로 옷입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라는 것이죠. 그냥 무턱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방법이란 내 열심과 내 힘으로 때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나를 통해 성령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뛰는 게 아니라 나에게 부어주시는 권능을 붙들고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입혀 지고 나서 그것을 통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힘과 능력으로 뛰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성령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드리는 인생…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가장 우선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 일에 내 마음과 관심이 온통 가 있는지 물어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열망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성해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적 교회의 은혜 가운데 진짜 성도로 예수님 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교회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조율돼야 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과 관심이 온통 어디에 가 있는가....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냥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옳다 라는 어떤 명제가 아니라 내 마음과 내 관심이 온통 쏠려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사도행전 적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그런 인생을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겁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온통 마음과 관심이 세상 나라와 세상 일에만 관심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정말 온통 나의 관심과 내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가 있는 그 신비가 있을 때 우리는 그 교회의 신비 를 통하여 내 마음에 그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는 그 놀라운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신비가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사용하심을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옷을 입혀 주시며 나를 통하여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경험 되게 될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쳐 주셨듯이 이 시대에 우리의 마음과 관심이 온통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있는 이 놀라운 변화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회복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친밀해 지는게 신앙생활이다."
행 1,1-2 | 05-19-2020
오늘은 사도행전의 개론과 같은 말씀으로 큰 그림을 함께 말씀으로 묵상 하기 원합니다. 이 책 제목은 사도행전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이 성경 자체의 이름은 사도행전이 아니라 행전입니다. 영어 제목도 ACTS라고 되어있고, 고대 사본들에 봐도 사도라는 말은 없이 그냥 행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행전이냐 하면 성령 하나님을 통해 태어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떻게 부활의 증인으로서 회개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가에 대한 증언들입니다. 사도행전은 신약성서 가운데 분량이 가장 긴 성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은 분량이 긴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큰 그림 아래 같은 저자와 관점을 가지고 쓰여졌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절 말씀에 등장하는 “내가 먼저 쓴 글”이란 바로 누가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행전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가복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전이해 없이 사도행전을 깨닫기 어렵고 사도행전의 큰 그림 누가복음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이 두 성경의 연관성을 가지고 큰 그림을 통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누가복음의 수신자 이기도 하며 사도행전의 수신자 이기도 한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이 큰 그림을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데오빌로라는 수신자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별명 일수도 있습니다만, 이 말 자체가 여러 불특정한 다수를 얘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데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하나님이고요, “빌로”는 필로스, 즉 사랑하는 혹은 친한..이란 뜻입니-